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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화)

무엇이 ‘허약한 반도체 거인’을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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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겨울’…‘독감’ 걸린 삼성


삼성전자 위기론이 갈수록 확산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준 가운데, 올 3분기 ‘어닝쇼크’를 냈다. 이런 삼성전자를 두고 외국계 투자은행(IB) 맥쿼리는 ‘허약한 반도체 거인(Sickly Semicon Giant)’이라 꼬집었다. 과거 삼성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었던 풍경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와중이다.

반도체사업부(DS부문) 수장 전영현 부회장이 이례적 사과 메시지까지 낸 가운데 삼성은 첨단 메모리 사업을 대상으로 고강도 상시 경영진단(감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연말 쇄신 인사를 위해 반도체사업부 임원을 대폭 줄이고 메모리·파운드리·시스템LSI 등 사장급 사업부장 배치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상수로 자리 잡은 삼성 위기론을 분석한다.

매경이코노미

위기론이 확산하며 삼성전자 주가는 신저가로 추락했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준 가운데, 올 3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했다. (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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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현 부회장 이례적 사과문

HBM·범용 D램 모두 뒤처져

최근 발표된 삼성전자 실적을 두고 ‘나 홀로 겨울’이라는 날 선 평가가 잇따른다. 삼성전자는 연결 기준 올 3분기 매출 79조원, 영업이익 9조1000억원의 잠정 실적을 기록했다.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영업이익은 3.7배가량 늘었다. 다만, 증권가 영업이익 전망치보다 1조3000억원 모자랐다. 국내 증권사는 대부분 영업이익 10조원대를 예상했다. 이조차도 올 상반기보다 대폭 낮아진 눈높이다. 증권가에서는 한때 8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됐던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이 5조원 혹은 그 이하로 떨어졌을 것으로 본다.

지속된 부진에 전영현 부회장은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쳐 송구하다”며 사과 메시지를 냈다. 전 부회장은 “기술과 품질은 우리의 생명이며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삼성전자의 자존심”이라며 “단기 해결책보다는 근원 경쟁력을 확보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부진 원인은 복합적이다. 올 초 예상과 달리, 범용 D램 수요가 둔화한 가운데, HBM 부진이 맞물린 결과다. 최근 반도체 산업 부가가치는 범용 D램에서 HBM으로 옮겨 가 메모리 사이클 변화 양상이 짙다. 과거 메모리 사이클은 PC·스마트폰 등 B2C(기업·소비자) 수요가 주도했다면, 최근에는 B2B(기업 대 기업) AI 칩 HBM이 핵심 변수다. HBM 가격은 범용 D램 대비 6~7배 이상 비싸며 영업이익률은 50%대에 달한다.

재고평가손실 환입 규모도 줄어든 것으로 알려진다. 시세 폭락으로 고가에 매입했던 재고자산의 경우 평가손실이 늘었지만, 올 들어 가격 반등세를 타자 평가손실 일부를 장부가액(취득원가)까지 ‘플러스(+)’로 환입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재고 감소와 가격 상승폭 둔화로 시간이 갈수록 환입 규모가 줄고 있다.

HBM 시장 부진은 뼈아프다. SK하이닉스는 HBM 5세대(HBM3E) 12단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양산에 나서는 등 삼성전자와 격차를 점차 벌린다. 삼성전자는 속 시원한 소식 없이 ‘품질 테스트 중’ ‘고객사와 사업화 지연’ 등 모호한 표현으로 일관한다. 신생·혁신 카테고리 HBM에서 SK하이닉스가 1위를 질주하면서 전체 D램 점유율 격차도 줄고 있다.

삼성 메모리 위기론을 일회성 이슈로 치부할 수 없는 배경은 또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에 HBM뿐 아니라, 범용 D램에서도 뒤처지는 양상이 뚜렷하다. HBM과 범용 D램 모두 삼성을 괴롭히는 대목은 수율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경쟁사를 의식해 신기술과 선단 공정을 조기에 적용한 게 수율 논란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진단을 내놓는다.

이런 우려가 제기되는 데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HBM은 여러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다. 즉, 개별 D램 성능과 안정적 수율이 HBM 핵심 경쟁력이다. 10나노급 D램 공정 기술은 1x(1세대)-1y(2세대)-1z(3세대)-1a(4세대)-1b(5세대) 순으로 개발되며 1c는 6세대를 말한다. 1c 공정으로 갈수록 선폭이 좁다. 선폭이 좁을수록 웨이퍼(반도체 원판) 한 장에서 나오는 D램 생산량이 늘어나 손익 경쟁력을 좌우한다.

1c에 가까울수록 공정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5세대 HBM3E에서 1a, 1b 공정으로 제조된 첨단 D램을 쌓아 HBM을 만들었는데, 수율 논란에 불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1b 공정부터 사실상 SK하이닉스에 밀리더니 1c(6세대)의 경우 SK하이닉스에 세계 최초 타이틀마저 내줬다.

특히, 삼성은 양산 초기 수율 경쟁에서 자꾸만 뒤처지는 모습이다. 최근 반도체 산업은 불연속적 기술 발전으로 기존 기술·제품 수명 주기(Life Cycle)가 갈수록 짧아지는 추세다. 양산 초기 수율 목표를 달성 못하면 짧은 수명 주기로 기업 손익 변동성이 확대된다. 중장기 기업 성과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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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 (삼성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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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강박 ‘사일로 현상’ 불렀나

파운드리 경쟁력·지배구조 과제

반도체 절대 강자로 평가받던 삼성의 부진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첫째, 삼성전자는 범용 D램 시장에서 오랜 기간 1위를 달려 ‘지위 불안(Status Anxiety)’에 노출돼 AI 등 신산업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위 불안은 지위 이론을 연구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주장한 개념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조직은 가격 프리미엄 형성, 비용 절감 등 유무형 이익을 누리지만, 실수나 결함 등이 외부로 노출돼 기존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는 삼성의 전략적 경직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들린다. 삼성전자 출신 IT 장비 회사 임원은 “1등을 해야 한다는 삼성의 강박이 결과지상주의로 변질되면서 새로운 영역에서 나타나는 실수나 오류를 조직 핵심 자산으로 내재화하는 과정을 가로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삼성 안팎에서는 1등 강박이 ‘사일로 현상(Silo Effect)’ 심화로 이어져 반도체 제조 공정(개발·설계·양산) 간 단절 심화 → 시너지 저하 → 양산 초기 수율 부진으로 나타난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분석이 나온다. 학계에서는 사일로 현상의 폐단 중 하나로 부서 간 ‘단절(Disconnected)’을 꼽는다. 한때 세계 전자 산업을 호령했던 일본 소니 역시 핵심 정보와 이익을 독식하려는 사업부 이기주의로 기술·노하우 공유가 가로막혀 시너지 퇴보를 초래했다.

가령, 선행기술팀에서 만든 기술은 연구개발(R&D)과 공정개발팀에서 넘겨받아 양산 수율에 맞춰 재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제조·공정 프로세스가 분절된 구조로 상호 연결성이 낮을 경우 유기적인 협업과 시너지를 기대하기 힘들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 TF에서는 TF 소속 사업부 내부 경쟁이 워낙 치열해 정작 프로젝트 성과 달성은 후순위로 밀리는 듯한 인상을 종종 받는다”고 귀띔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지난 2019년부터 ‘스피드 램프업(Speed Ramp-up)’ TF를 가동하며 연구개발 단계부터 양산과 생산성을 동시에 고려해 기술 개발에 힘썼다. 지난해부터는 수율 관리 기능도 더한 덕분에 초기 수율 확보에 성과를 내 ‘N자형 커브’ 현상을 조기 극복할 수 있었단 진단이다. N자형 커브는 선행기술에서 양산 이관 단계에서 가파른 수율 하락이 발생한 뒤 시차를 두고 수율이 회복되는 현상을 뜻한다.

공교롭게도 2019년 이후 삼성과 SK하이닉스 간 HBM 경쟁 우위 역전이 일어난 점도 흥미롭다. 2019년을 전후해 SK하이닉스는 통합적 관점에서 HBM 제조 단계별 연결성을 높였고 이는 최적 생산 체제 구축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당시 삼성에는 지배구조 악재도 덮쳤다. 이재용 회장은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 합병 의혹 등으로 2017년과 2021년 두 차례 구속 수감됐다. 전직 삼성전자 임원은 “의사 결정 정점에 선 총수의 구속 수감으로 삼성 수뇌부에선 기술 리더십 확보보단 지배구조 재정비를 위한 자원 배치에 힘을 싣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초격차 경쟁력이 실종되는 패착이 됐다”고 돌아봤다.

둘째, 산업계에서는 파운드리 부진을 삼성 HBM 경쟁력 저하와 연결 짓는 시각이 적지 않다.

HBM 특성상 세대가 거듭될수록 파운드리와 긴밀한 협업이 필수다. HBM은 적층 난도에 따라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됐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4세대까지를 HBM 1라운드로 본다. 2라운드는 5세대 HBM3E(8단·12단 등)부터 6세대 HBM4 이후를 아우른다. 2라운드에선 공정 난도가 훌쩍 뛴다.

특히 6세대 HBM4는 5세대와 비교해 공정 난도가 비교 불가다. HBM 패키지 최하단에는 ‘베이스 다이(Base Die)’가 배치된다.

베이스 다이는 GPU와 연결돼 HBM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버퍼 다이’ 혹은 ‘로직 다이’라고도 한다. HBM은 베이스 다이 위에 D램 단품 칩 ‘코어 다이(Core Die)’를 쌓아 올린 뒤 이를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로 수직 연결해 만든다.

이전 세대보다 월등한 고속·고용량 성능을 구현하려면 베이스 다이가 기존 HBM처럼 단순히 D램 칩과 GPU를 연결하는 역할을 넘어 연산 등 시스템반도체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이런 베이스 다이는 기존 D램 공정으로는 제작이 어렵다. HBM 세대가 거듭될수록 파운드리·패키징 영향력이 커진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는 5세대 HBM3E까지는 자체 D램 공정으로 베이스 다이를 만들었지만, 6세대 HBM4부터 대만 TSMC 초미세 선단 공정을 활용한다. 당초 삼성전자는 3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활용해 HBM 제작부터 패키징까지 ‘턴키 수주(일괄 제공·Turn Key)’를 늘릴 계획이었지만, 산업계와 시장에선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하다.

셋째, 지배구조 정비도 갈급한 과제다. TSMC는 글로벌 반도체 업계 거물로 사외이사 6명 진용을 꾸렸다. 피터 본필드 전 BT그룹 CEO·마이클 스플린터 전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CEO·모쉬 가브리엘로브 전 자일링스 CEO·얀시 하이 전 델타일렉트론 이사회 의장·라펠 리프 전 MIT대 총장 등이다. 대만 내각 출신 법률 전문가 1명을 제외한 모두가 글로벌 반도체 전문가·석학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관료·금융인·교수 등 기술과 연관성이 높지 않은 사외이사로 이사회를 채웠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강조하면서도 사업지원 TF를 부회장급 조직으로 둬 ‘옥상옥’ 지배구조를 자초했단 지적이 나온다. 기업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이사회지만, 실세 부회장이 있는 사업지원 TF가 존재해 의사 결정 리더십을 주도하는 주체가 불분명하단 지적이다.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휘말린 이후 사업지원 TF 위상이 커지면서 엔지니어 시각과 의견이 삼성 지배구조와 의사 결정에 반영되는 사례가 줄었다는 우려가 뒤따른다. 사업지원 TF 체제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쓴소리가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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