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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노벨문학상’ 한강이 되살려낸 존엄의 언어 [김민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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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소설가 한강이 2024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은 2016년 소설 ‘흰’ 출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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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이 지났습니다. ‘한강 신드롬’입니다.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의 책을 사기 위해 ‘오픈 런’이 벌어지고, 작가가 운영하는 책방에 인파가 몰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작가 이름과 대표작 제목으로 도배됩니다.

반가운 일이지만, 저는 보이는 현상 말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한강이 부순 장벽, 장벽의 잔해 속에서 새로 정돈되는 가치, 그리고 위로받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한강은 최근 한국 문학계에서 국제적 문학상을 가장 많이 받은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한강’과 ‘노벨문학상’을 연결해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대다수가 ‘남성·서구·백인’이라는 점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터입니다.

국내 문학계에선 ‘상대적으로 젊은’ 50대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여성 소설가들이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한국 현대문학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언론과 문단에선 나이 많은 남성 작가들을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왔다”고 전했습니다.

한강은 묵묵히, 꾸준히 썼습니다. ‘성별·연령·인종·지역·언어’ 같은 장벽에 균열을 냈습니다. 밑동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장벽들은 기어코 무너져 내렸습니다. 영국 가디언은 사설에서 한강을 ‘아웃사이더’로 지칭하며 “대담한 아웃사이더가 보상받았다”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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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가 14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다시 입고돼 진열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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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주의는 지독한 백래시(backlash·반동)에 직면해 있습니다. 국가폭력으로 고통받은 피해자와 가족들, 가부장제 구조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이 지지와 공감을 얻기는커녕 혐오와 차별의 표적이 됩니다.

거대한 장벽을 허문 한강 작가 역시 박근혜 정권 당시 ‘블랙리스트’에 오른 백래시의 피해자입니다. 그런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백래시 속에 일그러진 가치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계기로 작용할 겁니다. 많은 것들이 역행하고 퇴행하는 시대, 제자리 찾기가 시작될 겁니다.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매일경제 인터뷰).

한강의 말대로 <소년이 온다>를 마지막장까지 읽어낸 독자는 자신 안에 있던 뭔가를 발견하게 될 거라 믿습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도청에)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시민군)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소년이 온다> 에필로그)

극히 일부이지만, 다른 반응도 들려옵니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5·18 민주화운동과 제주 4·3사건을 피해자 입장에서 다뤘다고,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여성이라고 불만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땐 미국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의 조언이 유용합니다. 그는 신호(진짜 의미있는 정보)와 소음(잘못된 정보)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가치의 회복과 재정립, 새로운 시대의 부상을 예고하는 ‘신호’입니다. 일부의 폄훼는 한때의 ‘소음’에 불과합니다.

한강의 수상은 많은 이들을 위로하는 중입니다. <소년이 온다> 주인공 동호의 모델이 된 고 문재학군(1980년 당시 16세)의 어머니 김길자씨(85)는 “평생 내가 못해낸 일을 소설가 한 분이 좋은 글로 세계에 알렸다”며 감격스러워합니다.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파헤친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는 대목에 공감한 여성들이 한강의 수상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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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독립서점 ‘책방오늘’ 앞에서 한 시민이 사진을 찍고 있다. 정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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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탄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1995년 방한했을 때 기자간담회에 참석했습니다. 간담회 내내 한 가지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 작가도 노벨문학상을 받는 날이 올까…..

그날이 와서 기쁩니다. 수상자가 한강이어서 더 기쁩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2017년 노르웨이 문학의 집 강연)을 소명으로 삼는 작가여서 그러합니다. 작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 압도적 폭력에 고통받는 사람들, 그럼에도 끝내 존엄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를 찾아준 작가여서 그러합니다.

한강은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말하며 축하 행사와 기자회견을 사양했습니다. 가장 영예로운 순간에 가장 약한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과 그 이후의 세상은, 분명히 조금은 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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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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