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군산시민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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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트머리를 살짝 들어 올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지붕. 그 아래 옹기종기 모인 저마다 서로 다르게 생긴 블록들.
설계자가 한국의 ‘1세대 근대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건축물은 건축가가 지난 건축 생애에 바치는 오마주처럼 느껴진다. 주한프랑스대사관(1960), 을지로 중소기업은행(1983), KBS 국제방송센터(1985) 등 김중업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건축물이 하나씩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이 건축물은 군산시민문화회관(이하 군산회관). 김중업은 1985년 군산회관 설계경기에서 당선했다. 개관식은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989년 열렸다.
군산회관이 있는 전북 군산시 나운동은 서울로 치면 압구정 비슷한 곳이었다고 한다. 적산가옥으로 유명한 영화동·월명동과 달리 나운동엔 1980~1990년대 건설한 아파트가 많다. 아파트가 전체 집의 90%를 넘는다. 군산에서 나고 자란 선배는 나운동이 “거대한 놀이터였다”고 말했다. 아파트도 많고 놀 것도 많았다니, 압구정에 빗대는 게 영 터무니없지는 않다. 지금은 집은 낡고 상가는 공실인 채로 시간만 흘러가는 여느 지방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한국 1세대 근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1980~1990년대 시민 문화의 거점
10여년간 폐관 신세…민간에 20년간 내어주는 재생사업 파격적 적용
올여름 처음 연 행사인 북페어에 이틀간 6600명 방문하며 ‘북적’
군산회관은 이름 그대로 시민문화의 거점이었다. 군산회관 건립 전 군산의 예술가들은 재주를 뽐낼 공간이 없어 다방을 빌려 사진이나 그림을 전시했다고 한다. 군산회관 건립이 예산 부족 때문에 순탄치 않자 마라톤대회를 열어 모금운동을 벌였고, 지역 유리 생산업체는 공사에 쓸 유리를 기증했다. 이렇게 군산시민의 열망을 모아 세운 군산회관에는 군산시향 같은 예술 엘리트뿐만 아니라 동네 학교 학예회도 섰다. 회관은 광장이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전을 펼친 곳도, 2005년 방폐장 유치 찬반이 격돌한 곳도, 2009년 잇따라 서거한 전직 대통령의 시민분향소가 마련된 곳도 군산회관이었다.
사진은 군산시민문화회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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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나운동과 군산회관이 누린 영광의 시간은 여기까지다. 군산의 중심은 2000년대 들어 개발이 본격화한 수송동 등지로 옮겨갔다. 2013년 군산 예술의전당 개관 전후로 군산회관은 매각이 논의되는 신세가 됐다. 조명·음향 장비마저 떼어내 예술의전당으로 옮겼다. 주변 상인들은 군산회관을 허물고 주차장을 만들자고 했다. 그런 회관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군산시는 폐관을 결정했다. 그렇게 군산회관은 긴 잠에 들었다.
이렇게 군산회관이 잊혀갈 무렵, 충남대 건축학과 교수인 윤주선은 일본 도쿄에 있었다. 도쿄대에서 지역재생을 공부하는 유학생. 당시 일본은 이미 수십년간 도전한 ‘고향창생(故鄕創生)’의 실패를 마주하고 있었다. 홋카이도 유바리시는 폐쇄된 탄광 대신 관광을 육성하겠다며 석탄역사관 등 공공시설에 투자했다가 아예 지방 행정이 마비될 정도로 파산했다. 공공시설 건설비보다 운영·관리비가 더 많이 들 것이란 경고를 가벼이 여긴 탓이다. 정부 보조금 1억엔에 기댄 대가는 가혹했다. 보조금을 탕진하고 더 많은 보조금을 구걸해야 살 수 있는 도시를 보면 마약 중독자가 떠오른다.
윤주선은 유학 중 도쿄 도시마구 이케부쿠로에 살았다. 도시마구는 도쿄 23개 구 중에서 인기가 가장 없다. 그런 이케부쿠로에서도 인기 없는 장소가 미나미이케부쿠로 공원이었는데, 부랑자가 들끓어 사람들은 낮에도 근처를 지나길 꺼렸다. 보다 못한 도시마구는 파격을 택했다. 공원 안에 민간 카페·레스토랑을 유치하고 공원 관리까지 맡겼다. 가게를 운영하며 낸 수익 중 일부로 공원을 활성화해 보라는 취지였다. 공유재산인 공원을 통째로 민간에 임대한 셈이다. 상인 입장에선 공원이 살아야 가게도 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젊은이들이 기꺼이 돗자리를 펴는 공원이 됐다.
한국의 ‘1세대 근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군산시민문화회관은 음악 공연장, 월드컵 응원전 현장, 전직 대통령의 시민분향소 등으로 활용되며 이름 그대로 시민문화의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지난 8월31일부터 이틀간 군산회관에서 열린 도서전 ‘군산북페어’는 100개 업체가 참여해 방문객 약 6600명을 끌어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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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보조금 없이도 민간 참여를 대폭 허용해 지역재생을 유도하는 걸 ‘PPP(Public-Private Partnership)’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하면 ‘민관협력’쯤 된다. 국내에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민관협력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결과는 대개 공공시설을 3년 동안 위탁해 운영하는 형태다. 민간 인건비는 공공 보조금으로 나가고, 수익이든 적자든 모두 공공이 떠맡는다. 겨우 3년만 운영하면 되니 장기적 관점으로 뭔가를 기획·투자할 의지를 굳이 불태울 필요가 없다. 밖에선 ‘시민단체 일감 몰아주기’라며 곱지 않게 본다. 하지만 민간이 리스크까지 짊어지는 PPP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일본이 고향창생 30여년 만에 얻은 교훈이다. 윤주선은 귀국 후 관련 논문 ‘민관협력사업을 통한 자립형 도시재생 방안 연구’(2017)를 썼다.
미나미이케부쿠로 공원은 도시재생 성공 사례로 국내에도 꽤 알려져 있다. 혹시 이 공원처럼 군산회관도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군산회관만 얘기할 일은 아니다. 1980년대 호황기에 지방도시들은 이제 우리도 문화를 향유할 때가 됐다며 문화회관, 예술회관을 앞다퉈 지었다. 군산회관은 858석 규모인데, 인구 25만 도시에서 이만한 공연장을 굴리기는 쉽지 않다. 2017~2019년 문화예술회관 한 해 평균 적자액은 광주가 250억원, 울산이 155억원, 인천이 223억원이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인데도 이랬다. 지방도시는 인구마저 빠르게 줄고 있다. 상가마다 공실이다. 군산회관 같은 건물이 “머리 역할을 하고 문어처럼 다리를 쫙 뻗쳐 지역 상권까지 살려야 하는데, 그나마 서울 공연팀을 데려와서 겨우 연명한다”는 게 윤주선의 문제의식이었다.
2015년부터 군산 도시재생 사업에 뛰어든 윤주선은 공무원을 만날 때마다 PPP를 이야기했다. “공공시설을 한 20년 동안 민간에 내주고 기획·수익 창출·관리를 다 맡긴다고요? 그런 사례는 없을 텐데….” 2년 후, 군산시 부시장이 윤주선을 찾아왔다. “PPP, 그거 군산회관에 해보면 어떨까요?” 2019년 국토교통부는 군산시의 제안을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 직후 윤주선은 공무원들과 함께 손전등을 비추며 군산회관 지하실을 둘러보다 철제 캐비닛 하나를 발견했다. 열쇠 수십개를 찌른 끝에 문이 열리자 손때 묻은 도면 200여장이 쏟아졌다. 아주 오랫동안 그 존재조차 몰랐을 도면 귀퉁이엔 김중업의 날인이 선명했다. 마치 군산회관이 자신을 깨워주기를 기다린 것만 같았다. ‘거인의 잠’이 군산회관 재생사업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군산회관 재생사업의 개념은 미나미이케부쿠로 공원이 성공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민간과 공공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데 워낙 익숙한 토양인지라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다. 군산시가 민간 운영사를 뽑을 때도 최소 7단계 심사를 거쳤다. 이렇게 선정된 (주)커넥트군산이 향후 20년 동안 군산회관을 운영할 예정이다. (주)커넥트군산은 인천의 폐화학공장을 문화공간으로 성공적으로 재생한 경험이 있다. 군산 소재 대학인 호원대 산학협력단도 군산회관 재생에 힘을 보태고 있는데, ‘K-POP학부’가 있을 정도로 실용음악에 강한 대학인 만큼 문화공간과 결합해 시너지를 낼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31일~9월1일 열린 도서전 ‘군산북페어’는 앞날을 가늠해보는 자리였다. 출판사 등 100개 업체가 참여해 이틀 동안 방문객 약 6600명을 끌어모았다. 오랜만에 사람이 북적이는 군산회관을 보니,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지금 군산회관 공연장엔 좌석이 없다. 모두 철거해 무대와 객석이란 딱딱한 이분법이 사라지게끔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마치 피라미드 같았던 정면의 좌우대칭 계단은 권위주의 시대 건축물의 특징이었다. 이 계단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을 뚫어 어린이와 장애인·노인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냈다. 김중업이 40여년 전 처음 그렸을 군산회관은 지금 달라진 시민, 달라진 문화를 만나고 있다. 회관이 돌아왔다.
허남설 기자 |
허남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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