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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토)

“미쓰비시, 배상해야” 도쿄 금요행동 집회…응원 나선 한국 연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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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라르브르 앙상블’이 일본 시민단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 모임)이 벌이는 금요행동 집회에서 응원 연주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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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깊은 일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을 위해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희 연주가 올바른 한-일 관계를 위한 작은 날갯짓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특별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광주·전남 음악인들이 모여 창단한 ‘라르브르 앙상블’이 이날 일본 시민단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 모임)이 개최한 금요행동 집회에 참석해 응원 연주에 나선 것이다. 나고야 소송 모임은 1998년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서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바이올린 김수연·강연·윤은반·김지윤, 첼로 김도영, 플루트 조다윤, 클라리넷 김지영으로 구성된 라르브르 앙상블은 이날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 인도에서 ‘아리랑’을 비롯해 ‘가브리엘의 오보에’, ‘내 영혼 바람되어’, ‘마이웨이’ 같은 곡들을 연주했다. 이들은 우연한 기회에 연극 ‘봉선화’를 본 뒤 이번 응원 연주를 결정하게 됐다고 한다. ‘봉선화’는 일본나고야시민연극단이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동원됐던 조선인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당했던 강제 노역과 인권 유린, 이후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함께 일본의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투쟁 등을 소재로 만든 연극이다. 올해 초 광주문화재단 초청으로 광주 빛고을시민문화회관에서 공연을 벌여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바 있다.



김수연 라르브르 앙상블 대표는 이날 연주 뒤 “연극 ‘봉선화’를 보면서, 자칫 한국 사람들에게도 잊힐 수 있는 일을 일본 시민단체 분들이 긴 세월 해줬다는 걸 알게 됐고, 이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며 “한국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 금요행동에 직접 참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 대표는 “오늘 공연이 작은 행동일지 모르지만 마음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번 공연에 들어간 항공료 등 비용 전부를 스스로 부담했다.



한겨레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 모임)이 금요행동 집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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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반성과 배상을 촉구하는 나고야 소송 모임의 금요행동은 이날로 540회째를 맞았다. 2007년 7월부터 매주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진행해온 금요행동은 코로나19로 잠시 중단됐고, 최근엔 한 달에 한 차례만 집회를 열고 있다. 회원들은 금요행동 집회를 위해 매번 왕복 720㎞에 이르는 거리를 오간다.



이날 집회엔 라르브르 앙상블 팀과 함께 한국의 시민단체 회원들도 함께 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은 1944년 어린 소녀들을 강제동원해 가혹하게 노동을 시킨 뒤 임금조차 주지 않았다”며 “해방 이후 80년이 되도록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아무 조처도 하지 않고, 2018년 한국 대법원의 배상 명령도 6년 넘도록 이행하지 않으며 강제노동 할머니들의 삶을 짓밟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한국의 음악인들이 왜 이곳까지 찾아와 거리에서 연주를 하겠냐”며 “오늘 연주는 미쓰비시중공업의 양심을 묻는 음악이며, 이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미쓰비시의 양심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5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1차 소송 원고 가운데 한 명인 김성주 할머니가 95살 나이로 별세했다. 김 할머니는 14살 때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비행기 동체 철판을 자르다가 왼손 집게손가락 한마디가 잘리는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동생마저 “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일본인 교사의 거짓말에 속아 일본에 강제노동을 위해 끌려왔다. 해방 뒤 한국에 돌아왔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이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던 임금은 오지 않았고, 결혼 뒤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아 박해를 받은 아픔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김 할머니 별세 뒤 처음 열린 금요행동에서 나고야 소송 모임 쪽은 “김 할머니가 생전에 사죄를 받고 싶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은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며 “한을 품고 떠난 김 할머니의 원통함을 미쓰비시중공업에 전달하고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압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도쿄/글·사진 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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