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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단독] 대학생 한강 향한 스승의 헌사 “능란한 문장력…잠재력 꽃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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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소설가 한강은 1992년 연세대학교 학보사인 연세춘추가 주최하는 ‘연세문화상’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자료 1992년 11월23일 연세춘추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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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찾는 이들이 급증하며 서점가가 들썩이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한강의 작품들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1993년 한강이 등단하기 전 작품들도 회자되는데, 등단 1년 전인 1992년 연세문화상에서 ‘윤동주 문학상’을 받은 시 ‘편지’가 대표적이다. 연세문화상은 연세대 학보사인 연세춘추가 주최한다. 한강은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한강의 시에 대해 “한강의 작품들은 모두 능숙하다. 능란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 잠재력이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고 평가했다.



11일 한겨레 취재결과, 소설가 한강은 연세대 국문과 4학년 때인 1992년 ‘편지’라는 시를 연세문화상에 제출해 윤동주 문학상을 받았다.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로 시작하는 한강의 시에는 당시에도 특유의 서정적 문체가 돋보인다. 연세문화상 심사위원이었던 정현종 당시 국문과 교수와 김사인 문학평론가는 한강의 시에 대해 “한강의 작품들은 모두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는 무슨 선명한 조각과 또 달리, 앞으로 빚어질 어떤 모습들이 풍부히 들어 있는 에너지로 보인다”며 “능란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 잠재력이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고 심사평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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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문화상 수상 당시 심사평과 소감. 자료 1992년 11월23일 연세춘추 갈무리


한강은 당선 이후 ‘뽑힌 느낌’으로 “앓아누운 밤과 밤들의 사이, 그토록 눈부시던 빛과 하늘을 기억한다. 그들의 낱낱이 발설해온 오래된 희망의 비밀들을 이제야 엉거주춤한 허리로 주워담는 것이다. 목덜미가 아프도록 뒤돌아보며. 뽑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기쁨, 내 모든 눈물겨운 이들의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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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모교인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 11일 오후 수상을 축하하는 펼침막이 걸려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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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세대는 정문에서 각 단과대 건물로 이어지는 백양로 곳곳에 한강의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수막에는 ‘연세인 한강, 백양로에 노벨상을 새기다’, ‘연세의 가을, 연세의 한강’ 등이 적혔다.



아래는 수상작 ‘편지’의 전문이다.





편지
한강(국문과 4학년)



그동안 아픈 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 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 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 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어째서… 마지막 회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홉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됭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한겨레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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