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내년 3월까지 열리는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터빈 아래로 빛바랜 분홍 염료가 흘러내리며 매쉬 천을 서서히 물들인다. 권근영 기자 |
공중에 매달린 지름 7m 터빈이 서서히 돌아가다가 철컹, 멈춘다. 터빈은 잠시 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아간다. 괴수의 내장 같은 형태가 터빈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빛바랜 분홍색 끈적한 액체 염료가 바닥에 떨어진다. 54개의 쇠사슬에는 허물처럼 보이는 천 조각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작가는 이걸 ‘가죽(skins)’이라 부른다.
테이트 모던에 ‘이미래 월드’가 열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와 거친 기계음, 너덜너덜한 천 조각과 단단한 기계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충격을 준다. 1891년부터 100년 가까이 런던에 전기를 공급한 화력발전소. 이미래는 테이트 모던에 깃든 영국 산업의 역사에 주목해, 핵심 전시공간이 된 터빈홀을 예술 공장으로 다시 가동했다. 발전소 철거 후 별다른 용도 없이 남았던 크레인도 다시 쓰였다. 여기에 터빈을 매달아 아름다움과 기괴함이 공존하는 생산 현장으로 재구성했다.
늘어진 천 조각은 산업시대 광부들의 탈의실에서 영감을 얻었다. 갱도에 들어가기 전 옷과 소지품을 바구니에 담아 도르래로 천장에 매달아 보관했다. 그들의 흔적은 없고 거죽만 남아 열망과 좌절, 상처를 증언한다. 작품은 거대한 내장기관처럼 작동한다. 전시 기간 터빈이 돌며 액체 염료를 흘려보내고, 그 아래서 염색된 천은 건조를 거쳐 공중에 매달린다. 이렇게 추가되는 직물 조각은 전시 폐막 즈음엔 150개까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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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만난 이미래는 “터빈홀의 옛 이미지를 보고 동물의 몸 같다고 느꼈다. 여기를 어떻게든 다시 활성화하고 싶었다”며 “중심이 되는 터빈을 심장처럼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기념비적 장소이기에, 이곳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기념물을 보며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나 경외의 저변에는 무수한 노동에도 익명으로 사라진 이들에 대한 연민이 있다”고 덧붙였다.
‘열린 상처’라는 제목에 대해선 “산업주의는 일종의 흉터다. 예술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좌절한다. 그 좌절, 상처와 계속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의 조각에는 ‘아름답다’보다는 ‘기괴하고 역겹다’는 형용사가 따른다. 그는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미적 경험이 있지만 내게 아름다움은 가슴 아픔이다.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감동이라고 하듯, 열린 상처는 역경이나 비극을 함께 겪어내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거기서 나온다”고 말했다.
서울 출신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이미래는 서울대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괴물의 장기에서 체액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설치를 선보인 데 이어 부산비엔날레에서는 버려진 조선소를 비계와 가림막 원단으로 채운 ‘구멍이 많은 풍경: 영도해의 피부’로 대규모 설치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지난해 뉴욕 뉴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터빈홀 프로젝트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대형 거미를 시작으로,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인공 태양, 카르스텐 휠러의 초대형 미끄럼틀 등 전시 작가들의 대표작을 남겼다. 중국 아이웨이웨이는 도자기로 해바라기 씨 1억개를 구워 전시장에 깔았고, 칠레 출신 도리스 살세도는 167m 길이로 바닥에 균열을 내 억압과 차별에 경종을 울렸다. 유니레버에 이어 2014년부터 현대자동차가 후원한다. ‘현대미술 차력쇼’가 펼쳐지는 이곳에 초대된 최연소 작가 이미래는 앞선 이들의 이름과 작업에 짓눌리지 않았을까. 그는 “사람들은 내가 무서워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사실 난 무섭지 않고 신났다”며 웃었다.
카린 힌즈보 테이트 모던 관장은 “이미래는 올해 전시의 완벽한 선택”이라며 “터빈홀은 매년 수백만의 관람객이 들어서며 만나는 첫 공간인 만큼 경이로운 작품이 관객을 맞아주길 바라는데, 그게 바로 이미래가 해낸 일”이라고 말했다.
런던=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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