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가스 소비량의 42%와
정제유 수입의 51%를 러시아에 의존
그래픽=김현국 |
머나먼 한반도에 튀르키예가 파병한 이유는 소련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이었다. 소련은 1930년대 이후 튀르키예 동부 국경 지역을 할양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에 군사기지를 설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해왔다. 튀르키예는 2차 세계대전 시기 중립을 표명하면서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중립적 태도로 인해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출범할 때 가입하지 못했다. 단신으로 소련에 맞서야 했던 튀르키예로서는 유엔의 6·25전쟁 파병 요청은 NATO에 가입할 수 있는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파병을 결정한 튀르키예는 피의 대가로 1952년 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앙카라 공원은 냉전 시기 협력의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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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련의 위협에 떨던 튀르키예였지만 지금은 소련의 후예인 러시아와 친밀해졌다. 러시아는 튀크키예의 두 번째 교역 대상이고, 튀르키예는 러시아의 세 번째 교역국이다. 양국의 긴밀한 관계는 에너지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천연가스 98%, 석유 91%, 석탄 77%를 수입에 의존하는 튀르키예에 러시아는 최대 에너지 공급원이다. 천연가스의 경우 흑해를 가로질러 양국을 직접 연결하는 블루스트림과 투르크스트림 파이프라인을 통해 전체 소비량의 42.2%를 공급받고 있다. 석유의 경우 원유 이외에 휘발유, 경유 등의 정제유를 러시아로부터 대량으로 수입하는데, 러시아의 비율은 전체 수입 가운데 51%에 이른다. 유럽 최대의 석탄 소비국인 튀르키예는 전체 소비량의 77%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러시아로부터의 수입량이 70%를 차지한다.
화석 에너지만 러시아에 기대는 게 아니다. 2023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원자력발전도 러시아 원자력 기업인 로사톰이 건설 및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튀르키예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150억달러를 지원하고, 천연가스 대금 납입 기간을 1년 연기해주는 혜택을 제공했다. 튀르키예를 같은 편으로 붙잡기 위해 ‘당근’을 던진 셈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에너지 협력을 더욱 돈독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러시아로부터 원유의 25%, 경유의 40%를 수입하던 유럽연합(EU)은 전쟁이 벌어지자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을 중단했다. 그러자 튀르키예는 러시아산 원유와 정제유를 수입해 이를 튀르키예산으로 포장한 다음 EU에 재판매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2023년 2월부터 1년간 튀르키예의 러시아산 석유류 제품 수입은 전년도에 비해 105%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 EU에 대한 수출도 107% 증가한 것이 단적인 증거다. 튀르키예의 정유사들도 러시아산 원유를 국제 시세에 비해 저렴하게 들여와 경유 등으로 정제해 EU에 수출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다.
천연가스의 경우 튀르키예는 러시아산을 아제르바이잔, 이란 등으로부터 수입한 물량과 혼합해 유럽 시장에 재판매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는데, 최근 불가리아·헝가리·루마니아 등과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튀르키예는 국토의 동·남·북쪽이 가스 수출국과 접하고 있다. 서쪽은 세계 최대의 가스 수요처인 EU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전쟁은 튀르키예에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과도하게 높아지는 것도 우려해왔다. 튀르키예에는 “러시아와 거래를 하는 것은 곰과 잠자리에 드는 것과 같다. 언제든지 긁힐 수 있다”는 오스만 시대 속담이 전해 내려온다. 러시아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을 드러낸 표현이다. 튀르키예의 입지는 에너지 공급 다변화에 유리하다. 중동의 이란·이라크와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고,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투르크메니스탄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덕분이다.
지리적 이점을 누리는 만큼 복잡한 지역 정세가 튀르키예의 발목을 잡아오기도 했다. 이라크로부터의 원유 수입을 확대하려는 방안은 쿠르드족 자치정부와 이라크 중앙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란으로부터의 가스 도입은 이란의 공급 여력 부족으로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카스피해와 인접한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으로부터의 가스 공급을 확대하는 것은 러시아, 아르메니아 등의 견제와 반대로 인해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이슬람과 투르크 민족이라는 공통점을 토대로 주변 국가와의 결속을 강화하면서 기회를 노려왔고, 최근 카스피해 횡단 파이프라인 건설 합의 등의 성과를 도출하고 있다. 최근 EU가 아제르바이잔 및 투르크메니스탄 천연가스 도입을 확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들 국가와 EU 사이에 위치한 튀르키예는 자연스럽게 EU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가스 허브로서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더해 유럽의 거대 에너지 기업인 셸(Shell)과 LNG(액화 천연가스)를 도입하는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전체 가스 소비량의 8%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셸과의 계약 역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요즘 튀르키예의 외교 행보는 현란하다. 단기적으로는 서방 국가의 제재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한 러시아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원을 다양화하면서 중동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는 전략을 가동 중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의 대규모 에너지 수입국이다. 시장에서 구매력은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매력에 걸맞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형제의 나라인 튀르키예와 한국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새삼 궁금해진다.
美 전술핵까지 배치된 튀르키예, 원자력 통해서는 러시아와 긴밀
튀르키예의 원자력 사업은 전 세계 원자력 사업자에게 매력적이지만 잡기 힘든 존재다. 원자력 산업을 영위하는 나라라면 한 번쯤은 튀르키예와 협상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튀르키예의 원자력발전 구상은 196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논의를 거쳐 남부 악쿠유 지역에 최초의 원전을 건설하기로 1976년 결정했고 사업 파트너로서는 스웨덴의 아에사(AESA)가 선정되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가 1980년 정부 보증을 철회하면서 사업은 중단되었다. 이후 캐나다, 미국, 서독 업체를 대상으로 다시 사업을 추진하였지만 건설 및 운영 자금 조달에 있어 튀르키예 정부의 보증 제공을 둘러싼 갈등으로 사업은 좌초했다. 2013년에는 북부 시노프 지역에 일본·프랑스 컨소시엄과 원전을 건설하기로 합의했지만 사업비 증가와 비용 분담을 둘러싼 갈등 끝에 2020년 취소되었다. 결국 튀르키예 최초의 원전은 러시아 정부가 사업을 보증하고 자금을 지원하면서 2023년 완공되었다.
대한민국은 1995년 튀르키예 원자력 사업의 컨설턴트로 한전이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튀르키예 원전 사업 참여를 타진해왔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튀르키예 2호 원전의 경우 러시아와 경합을 벌이고 있지만 1호 원전 건설 실적과 더불어 국가의 자금 조달 보증을 내세우는 러시아가 유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호 원전의 경우도 자금뿐만 아니라 원자력 기술 제공을 약속하고 있는 중국에 기울고 있다. NATO 회원국으로서 미국의 전술 핵무기까지 배치되어 있는 튀르키예가 원자력을 통해 미국의 경쟁국과 더욱 긴밀해지는 상황은 역설적이지만 냉정한 국제 질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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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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