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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서바이벌의 법칙: 여왕벌 게임·흑백요리사·더 인플루언서[백승찬의 우회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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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가 비속어 섞어 뱉은 분노

제작진은 되레 흥행 요소로 삼아

관심경제 사회의 솔직한 반영

승자독식 사회의 살벌한 풍자

경향신문

서바이벌 예능 ‘여왕벌 게임’의 한 장면. 모니카가 탈락한 뒤 제작진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 웨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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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방송이 존나 지겹습니다. 이 게임이 그렇게 재밌습니까? 그렇게 사람 본능 건드리면서 팀원들 바꿔가면서 TV를 보는 사람들이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제가 솔직하게 게임한 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이걸 원하세요? 결국에는 사람들의 악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결국에는 깨끗하게 마무리 지으실 거죠? 우승이라는 글자로. 진짜 우승이 어딨습니까? 이딴 식으로 하는데. 정신 차리세요. 전 진 게 아닙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에서 방영 중인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여왕벌 게임>에서 ‘여왕벌’ 모니카가 말했다. 4일 공개된 4화에서 탈락이 확정된 후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었을 때였다.

이날 여왕벌과 해당 팀의 ‘수컷’ 중 한 명은 한정된 시간 동안 진흙을 최대한 많이 옮기는 게임을 했다. 최종 1위를 차지한 ‘여왕벌’ 장은실은 패배한 세 팀 중 한 팀의 우두머리 수컷을 영입할 수 있었다. 우두머리 수컷을 빼앗긴 팀의 나머지 인원은 모두 탈락한다. 장은실이 지목한 이는 모니카 팀의 우두머리 수컷이었다.

탈락한 수컷들이 간략하게 소감을 말하고 나서도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모니카는 한참을 침묵했다. 다른 출연자들은 모니카의 눈치를 봤다. 모니카는 입술이 떨릴 정도로 화를 참고 있었다. 모니카는 전문 연기자가 아니기에, 이어진 발언이 대본에 있거나 화난 척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모니카는 정든 팀원을 상대 팀에 빼앗기거나 꼴찌가 아닌데도 탈락해야 하는 상황에 분노하며 제작진에게 “정신 차리라”고 화를 낸 것이다.

재밌는 것은 <여왕벌 게임> 제작진이 자신을 향한 비난 장면을 편집하기는커녕, 노골적인 비속어까지 그대로 살려 내보냈다는 점이다. 심지어 “저는 방송이 존나 지겹습니다”라는 코멘트는 비장한 음악을 깔면서 카메라 각도를 달리하며 반복해 보여줬다. 방송사 유튜브는 이 발언의 자막과 모니카의 얼굴로 섬네일을 만들었다.

모니카는 게임에 완전히 몰입해 이례적으로 분노했지만, ‘사람 본능’을 건드려 ‘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여왕벌 게임>만이 아니다. 공전의 인기를 끌며 8일 최종화를 방영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은 요리사들의 ‘계급’을 ‘백수저’와 ‘흑수저’로 나눴다. 백수저 20명이 세트장 높은 곳에서 팔짱 끼고 지켜보는 사이, 흑수저 80명은 20명에 들기 위한 일종의 예선전을 치러야 했다. 더 큰 논란을 부른 규칙은 4라운드 ‘흑백 혼합 팀전 레스토랑 미션’에서 나왔다. 세 팀이 식당 손님에게 내놓을 음식과 가격을 정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한참 미션을 진행하던 도중 각 팀에서 한 명씩을 방출해야 한다는 규칙이 안내됐다. 방출된 인원들은 새로운 팀을 만들어 급히 미션에 참여해야 했다.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겠다며 자발적으로 팀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투표 끝에 방출된 사람도 있었다. 해당 분야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는 요리사는 쓰임새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받아 쓸쓸하게 내쫓겼다.

모두가 사는 ‘서바이벌’은 없다. 공동 우승만큼 맥빠지는 경쟁 구도도 없다. 모든 서바이벌 예능은 ‘최후의 1인’을 가리는 과정을 그린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발군의 실력을 보이더라도, 결국 1명을 제외하고는 탈락한다. 서바이벌 예능은 각자의 레인에서 달려 기록으로 금메달을 가리는 육상 경기가 아니다. 서바이벌 예능은 탈락자를 만들기 위해 때로 협동보다는 견제, 찬사보다는 질투, 동료애보다는 이기심이 있어야 승리하는 규칙을 강제한다. 주어진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참가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규칙을 따른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의 극심한 비난을 받는 참가자도 생긴다.

참가자가 유도된 규칙에 따라 ‘악한 모습’을 내보여 비난받는 사이, 제작진은 높아진 화제성에 웃음을 참는다. 넷플릭스 <더 인플루언서> 1라운드에서 인플루언서 77명은 서로에게 ‘좋아요’와 ‘싫어요’ 투표를 했다. 참가자들은 자연스럽게 ‘좋아요’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제작진의 숨은 규칙은 ‘좋아요’와 ‘싫어요’의 합산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다. ‘싫어요’조차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작진의 의도를 간파한 몇몇 참가자들은 쉽게 1라운드를 통과했다. 서바이벌 예능 제작진은 ‘좋아요’와 ‘싫어요’를 모두 즐긴다.

‘논란’조차 흥행의 동력으로 삼는 서바이벌 예능은 관심경제 사회의 솔직한 반영이다. 아울러 운과 실력으로 수많은 경쟁자를 제친 1인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에 대한 살벌한 풍자다.

경향신문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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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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