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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회사 빚으로 자사주 매입…고려아연, 이게 밸류업인가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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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고려아연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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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포스트’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의 옛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은 최고경영자(CEO) 재임 중 ‘펜타곤 페이퍼’, ‘워터게이트’ 등 특종 보도를 이끌었다. 그는 1963년 남편이 돌연 세상을 떠나자 경영을 맡아 워싱턴포스트를 세계적 언론사로 키웠다.



자본시장에선 탁월한 경영자로 통한다. 무명이었던 워런 버핏을 이사로 발탁해 경영 원칙을 세웠다. 현금과 자본을 신중하게 사용하며 빚(부채)을 내지 않고, 주가가 낮을 땐 대규모 자사주(회사가 취득하는 자기주식)를 최대한 싸게 사들였다. 기업의 자사주 매입을 회사의 투자로 여긴 셈이다. 그레이엄 재임 기간에 워싱턴포스트 주주들은 연평균 20%가 넘는 투자 수익률을 올렸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이 꼽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의 모범사례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미국에서 자본시장 전문 변호사로 일했다. 그가 이 일화를 모를까? 그러나 똑같이 밸류업을 앞세운 고려아연의 최근 행보는 딴판이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최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고려아연 자사주를 주당 83만원에 사들이기로 했다. 경영권 분쟁 직전 주가에 견줘 50%나 비싼 금액이다. 회사는 이번 자사주 매입을 위해 2조원 넘는 빚을 내기로 했다.



자사주 매입은 회사의 현금과 주주 몫의 자본을 소진시킨다. 그러니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투자의 상식은 자사주 매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게 당연하다. 고려아연의 사외이사 면면을 보면 성용락 전 감사원장 직무대행·권순범 전 대구고검 검사장·서대원 전 국세청 차장·이민호 전 환경부 정책실장 등 전관들이 즐비하다. 만약 이들이 자기 돈이 걸린 일이어도 이런 고가매수에 찬성하겠나.



고려아연은 애초 자사주 매입 자금 2조6천여억원 중 1조5천억원이 ‘자기자금’이라고 투자자들에게 공시했다. 은행에서 받은 대출이어도 내 계좌에 현금이 입금됐다면 ‘내 돈’이라는 황당한 논리다. 그러다 뒤늦게 자사주 매입에 투입하는 자기자금이 5천억원뿐이며 나머지 2조1천여억원 모두 차입금이라고 수정 공시를 했다. 이처럼 부채 규모를 축소하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공시는 회사 빚으로 자사주를 고가에 사들이는 게 명분 없는 일이며, 밸류업에도 역행한다는 걸 회사도 익히 알고 있다는 의미다.



한 기업지배구조 전문 법조인은 고려아연의 차입금을 동원한 자사주 매입을 가리켜 “외부의 공격을 받아 성을 내주게 생겼다며 성안의 쌀을 몽땅 태우겠다는 꼴”이라고 했다. ‘고려아연’이란 성 안에는 지분 1.84%를 보유한 성주(최윤범 회장) 외에도 4만명 넘는 주주들이 있다. 자사주 매입의 ‘상식’을 잘 아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자본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뭐라고 생각할지 걱정스럽다.



한겨레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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