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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기억할 오늘] 기회주의와 합리주의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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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모리스 파퐁
한국일보

1998년 2월 법원에 출두하는 모리스 파퐁.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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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200여 명을 포함해 최소 1,500여 명의 프랑스 유대인을 색출해 나치 멸절 수용소로 넘긴 비시 프랑스 정부의 고위 관료 모리스 파퐁(1910~2007)의 ‘비인도적 범죄’ 재판이 종전 50여 년 만인 1997년 10월 8일 시작됐다. 그의 재판은 파퐁의 혐의에 앞서, 도드라진 나치 부역자였던 그가 전후 프랑스 정부의 집요한 과거사 청산 및 나치 부역자 심판의 거름망을 그토록 오래 벗어나 수도 파리 경찰국장과 장관까지 역임한 사실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유력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공직에 입문한 그는 1940년 나치의 프랑스 점령 직후 내무부와 남서부 지롱드 지역 행정-치안 국장을 지냈고 종전 직전 자유 프랑스 수반이던 샤를 드골과 인연을 맺으면서 절묘하게 신분을 세탁, 레지스탕스 조력자로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알제리와 모로코 등 식민지 장관을 거쳐 파리 경찰국장(1958~1967)과 예산장관(1978~1981) 등을 역임했고, 1961년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의 파리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등 식민지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공로로 레지옹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파퐁은 시류를 읽고 변신·적응하는 데 능했다. 시민·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윤리적 이성보다 어떤 선택이 더 (자신에게) 이로운지 판단·실행하는 데 기민했고, 그런 자신을 정당화·합리화하는 데 유능했다. 가치가 사라진 세상에는 기회주의와 합리주의의 경계란 없다.

1981년 한 주간지(Le Canard Enchaine)의 폭로로 시작된 그의 나치 부역 논란은 무려 14년에 걸친 집요한 명예훼손 소송 공방을 거쳐 1997년에야 재판으로 이어졌다. 그는 관료로서 명령을 수행한 것일 뿐이라며 줄기차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듬해 10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그는 항소심 직전 스위스로 도피했다가 체포·송환됐고 2002년 9월 고령·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됐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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