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2018년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지낸 임종석 전 의원이 지난달 19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9·19 공동선언 6돌 기념식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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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애 | 정치팀장
“이러다 정말 전쟁 나는 거 아냐?”
중고등학교 친구 케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5년여 만이다. 케이가 이런 내용의 문자를 보내온 것은. 케이는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하루가 멀다 하고 문자를 보냈다. 북한이 단거리·중거리·대륙간탄도 미사일을 연일 쏘아대던 때였다.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쌍둥이를 낳은 케이에게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현실 공포’였다. 이민을 가야 하나 싶다던 케이의 문자는 평창겨울올림픽을 거쳐 남북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동안 끊겼다가 지난해부터 다시 시작됐다.
“통일, 하지 맙시다.”
임종석 전 의원의 도발적 한마디가 ‘여의도’에 논란을 몰고 왔다. “북한 지령을 받았냐”는 막무가내 색깔론을 걸러내도 비판이 더 많은 듯하다.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입에서 “반헌법적 발상”이란 말이 나왔고, 민주당에서도 “통일 포기”란 비판이 이어졌다. 임 전 의원은 졸지에 자신의 소신이자 헌법적 가치인 통일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 사람이 됐다.
과문한지라 “통일에 대한 가치와 지향은 헌법 정신에 남기고 미래 세대에게 넘겨주자”는 임 전 의원의 말과 “통일을 지향하되 잠정적 두 국가 현실을 인정하자”고 비판하는 분들의 말이 크게 다른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큰 틀에서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다’로 수렴되는 말로 들렸다. 물론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며, 목적지가 같아도 가는 방법이 다르면 도착하는 시간도 풍경도 달라질 수 있는 법. 그러니 헌법에 통일을 어떤 식으로 명기할 것이냐, 헌법 3조 영토 조항을 폐기(혹은 개정)할 것이냐 하는 디테일들은 굉장히 중요한 차이이긴 하다. 다만 임 전 의원의 말마따나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토론하고 접점을 찾아가면 될 일이지 싶었다. 막말로, 먹고사는 게 급선무니 ‘동성혼 허용’ ‘차별금지법 제정’(차별받지 않고 사는 것, 그 또한 헌법적 권리다!)은 나중에 해도 된다는 분도 있는데, 통일하지 말자는 말이 뭐 대수인가.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얘기하고 있는데 굳이 “통일, 하지 말자. 2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말할 필요가 있었냐는 지적에 살짝 흔들리긴 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저 정도 말을 했으니 화석화된 통일이, 평화가 새삼 얘깃거리라도 된 것 아닌가. 정치적 인기에 급급해 임 전 의원이 너무 나갔다고들 하지만, 모처럼 그가 정치인으로서 제 할 일(어젠다 제시)을 한 것은 아닌지.
임 전 의원의 폭탄 발언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여전히 유효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국민 10명 중 3명 이상(35%)이 ‘북한과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절반 넘게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어려운 만큼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54%)고 답하는 시대다.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33.9%)이 싫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10월2일 ‘2024 통일 의식 조사’와 9월25일 발표된 전국지표조사 결과,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한테 물어보니 요새 학교에서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의무적으로 가르치진 않는다고 했다.
지금 우리의 소원이 통일인지 물어야 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놈의 통일’이 오히려 전쟁 위험을 더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어서다. 북한은 오늘도 ‘7차 핵실험’ 예고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대한민국이 현재 누리는 자유를 북녘땅으로 확장하겠다’는 윤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 사용을 기도한다면 정권 종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만 한다. 남북이 이렇게 브레이크 없이 마주 달리다가 작은 국지전이라도 발생하면, 누군가는 다치고 또 죽을 수도 있다. 때늦은 응징과 보복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내 친구 케이가 원하는 건, 우발적 충돌을 막을 방법, 케이에겐 지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 ‘우리의 소원은 평화’란 노래가 간절하다.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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