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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이집트 개혁과 중동 평화의 꿈을 앗아간 비극 [역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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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피살

뉴스1

안와르 사다트. (출처: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rom Washington, D.C., 사진(1978),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Ded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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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81년 10월 6일, 이집트의 모하메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카이로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 도중 암살당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저지른 이 사건은 이집트는 물론 중동 전체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끌어내며 19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이스라엘과의 '배신'으로 비춰졌고, 이슬람 세계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집트 내부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반발이 거셌다.

사다트의 개방 정책과 서구화 노력은 이집트 사회 내부에서 보수적인 세력과 종교적인 세력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집트의 좌파 세력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의 개방 정책은 경제 성장을 가져왔지만, 사회 불평등 심화와 실업 문제 등 사회 불안정도 심화했다.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 이후 이집트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이집트 사회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했으며, 중동 평화 프로세스에 차질을 빚었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치적 불안정은 더욱 심화했다.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은 전 세계에도 큰 충격을 줬으며, 많은 국가가 이를 강력히 비난했다. 특히 중동 평화를 위해 노력해 온 국가들은 사다트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다트의 뒤를 이어 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장기 집권 시대를 열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정책을 대체로 계승하면서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유지하고,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이집트 사회에 지속적인 위협이 됐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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