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0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의 총장과 차장급 인물들 사진. 앞줄에 안창호(가운데), 신익희(왼쪽), 현순(오른쪽)이 앉아 있다. 이 사진의 윗부분을 보면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분명히 쓰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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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1949년 가을 대한민국 정부는 국회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이에 의하면 3월1일은 3·1절, 7월17일은 헌법공포기념일, 8월15일은 독립기념일, 10월3일은 개천절로 되어 있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논의 끝에 헌법공포기념일은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은 광복절로 고치기로 했다. 개천절은 정부안에서 양력 10월3일로 되어 있었는데, 본회의에서 음력으로 할 것인가, 양력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벌인 끝에 양력 10월3일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개천절은 대종교 쪽에서 기념해오던 날인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교민단은 1919년 10월3일을 ‘건국기원절’로 명명하여 이후 계속 경축식을 거행해왔다. 대한민국의 ‘개천절’은 임시정부의 ‘건국기원절’을 계승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개천절은 건국절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1949년 4대 국경일이 이렇게 정해졌으나, 이듬해 6월 전쟁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광복절 기념식 같은 것은 제대로 거행할 수 없었다. 1951년 8월15일에야 정부는 광복 6주년 기념식을 경남도청 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할 수 있었다. ‘광복’이란 흔히 말하듯이 ‘빛을 되찾다’는 뜻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라를 영예롭게 되찾다’라는 뜻이다. 이때 나라는 영토, 국민, 주권 등을 의미한다. 1945년 8월15일 이후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하에 놓였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광복’이 이루어진 날은 1948년 8월15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도 결국은 ‘광복’으로 가는 날이라고 보아, 광복절의 기점을 1945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언론을 보면 ‘광복절’은 1945년의 해방과, 1948년의 정부 수립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2006년께부터 1948년 8월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론으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1948년설은 국가의 3요소인 영토, 주권, 국민을 다 갖추어 나라를 세운 것은 1948년이기 때문에 이때를 건국의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1919년설은 1919년에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다는 점, 제헌헌법에서도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대목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1919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주장한다.
앞서 본 것처럼 ‘광복’이라는 말은 ‘잃었던 나라를 되찾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건국’에는 없던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뉘앙스가 있다. 20세기 이후 아시아의 여러 나라 가운데 ‘건국절’을 제정한 나라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나라를 세운 10월1일을 ‘국경절’이라고 이름 붙여 기념한다. 중화민국(대만)은 신해혁명이 시작된 우창봉기일인 10월10일을 ‘쌍십절’이라 하여 기념한다. 북한은 정권수립일인 9월9일을 ‘구구절’이라 부르고 있다. 베트남은 호찌민이 독립을 선언한 1945년 9월2일을 ‘국경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일본은 일본신화에 나오는 초대 진무천황이 즉위했다고 하는 날을 임의로 2월11일로 정하여 ‘건국기념의 날’로 삼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 북한, 베트남이 ‘건국절’이나 ‘독립기념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신생독립국가라는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제헌국회에서도 ‘독립기념일’이라는 표현을 피하고 ‘광복’이란 말을 쓴 것은 한국은 신생국이 아니라 되찾은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건국’이니 ‘건국절’이니 하는 표현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려와 조선은 ‘개국’ 혹은 ‘개창’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1921년 1월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신년하례식 기념촬영 사진. 두번째 줄에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등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에서도 사진 아래쪽에 1921년을 ‘대한민국 3년’이라고 쓰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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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대한민국 개창의 역사는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더 이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약 9년 동안 한국인들은 대한제국을 승계하면서도 이를 대체할 국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대한제국의 주권은 이제 국민에게 넘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7년 상하이의 한국 지식인들은 ‘대동단결선언’을 통해서 이제는 공화국을 세워야 할 때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에 모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4월10일 밤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논의 끝에 이튿날 국호를 ‘대한민국’, 국체와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하는 나라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이를 내외에 천명하였다. 또 이들은 대의민주주의, 보통선거제, 남녀평등,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내용으로 하는 10개조의 ‘임시헌장’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이날은 우리 역사에서 왕조국가(제국)가 민주공화국(민국)으로 이행하는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4월11일을 ‘민국절’이라 명명하여 국경일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비슷한 사례로 미국과 필리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미국은 1776년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지만, 연방정부를 수립한 것은 1789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1776년 7월4일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자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필리핀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필리핀은 1946년 독립할 때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필리핀은 1946년이 아니라 1898년 독립을 선언한 6월12일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3월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11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물론 바로 주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투쟁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45년 ‘해방’을 얻어냈고, 1948년 ‘광복’을 얻어냈다. 1919년 4월11일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대한민국의 탄생일을 ‘민국절’로 만들어 기념하는 데 모두의 뜻이 모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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