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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책&생각] 전통의 압구정과 신흥 성수동이 강 건너 마주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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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3년 만에 장편 ‘위대한 그의 빛’을 펴낸 심윤경 작가. 한강변 산책 중 “성수동과 압구정동이 이렇게 정확하게 마주 보는 위치였구나” 인식했다고 한다. 소설의 계기로, 미국 고전 ‘위대한 개츠비’와 1:1 대응하는 설정과 기호가 많다. 문학동네 제공




한겨레

위대한 그의 빛



심윤경 지음 l 문학동네 l 1만6800원



부부가, 초대한 손님을 앞에 두고 다툰다. 서울 압구정 H(에이치)아파트가 ‘고향’인 광채와 연지. 증여받은 아파트를 신혼집 삼아 지금까지니 얼추 50년 되려는 아파트와 나이가 비슷해졌다. 강 건너 바로 맞은편 성수동 T(티)타워가 최근 휘황하다.



“저런 얼치기 타워랑 압구정동의 다른 점이 뭔지 알아? (…) 여긴 모두 한국 사람들이야.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근본 있는 사람들! (…) 하지만 저런 겉만 번드르르한 데 가보면 어떤지 알아? 다 중국, 동남아, 중동에서 왔어. (…) 저긴 도덕도 없어. 뻔뻔하게 이슬람교를 믿거나 마약을 퍼뜨린다고.(…)”



같은 ‘금수저’이긴 해도 남편과 달리, 순수와 낭만주의를 지닌 연지가 대거리한다. “그래, 당신 눈에는 다 얼치기겠지. 우리는 얼치기가 아니라서 다 무너져가는 이 아파트에 몇십 년이나 근본 있게 처박혀 있고 얼치기들은 새집에서 사람 사는 듯이 살지. 아주 지긋지긋해, 그놈의 한강, 그놈의 재개발. 그냥 싹 다 망해버리면 좋겠어.”



듣고만 있는 규아는 연지의 동갑 사촌이다. 미국 뉴욕에서 20년가량 살다 귀국해 애증하는 연지의 집을 이제야 처음 들렀다. 80억짜리를 깔고 자는 이가 ‘재개발 싹 망하라’ 하니, 시멘트공장 있던 성수동 시절 부모가 매달렸던 지역주택조합 사업 좌초 뒤 충격에 숨까지 거둔 과거가 떠오를 만하다. 규아가 막 유학 중이던 20여년 전 일이다.



이 상징적 대목으로부터 현대 서울 사람의 욕망과 순수, 미혹과 냉소, 조증과 울증을 삼키고 배태하는 자본사회 병리적 세태를 핍진하면서도 은유적으로 전개시키는 소설의 제목은 ‘위대한 그의 빛’. 공간 서사의 장인이라 할 심윤경 작가가 3년 만에 펴낸 새 장편이다. 1925년 고전 ‘위대한 개츠비’(피츠제럴드)의 2024년 서울판이다.



다만 밀수 사업가 개츠비도 실패하고 말았을 가상화폐가 이번 소설에서 부각되듯, 100년 거리 두 소설에서 자본의 양식만 바뀐 건 아니다. 부동산이 부부의 위기를 증폭시키고, 연지는 성공해 티타워에 자리 잡은 옛 연인 재웅이 다시 내민 손을 적극 잡는다.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데이지는 남성 세계(천박한 부자 남편 톰 뷰캐넌, 데이지를 위해 부를 쟁취한 개츠비)에서 허락된 만큼만 순수했고, 허락된 만큼만 욕망하다, 톰에게 안착한다…고 읽히게끔 데이지의 남자 사촌이자 소설의 화자인 닉은 썼다. 본래 데이지는 밤이며 흐린 날은 피지 않(못하)는 꽃이다.



연지의 끝은 어떨까. 실로 ‘막장’에 가까운 파국에도, 연지가 불륜녀, 사치녀, 아들 잡아먹은 악녀로만 기록되지 않게 하는 이 있으니 바로 소설의 화자 규아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데이지 다시 쓰기’다. 다만 ‘데이지, 다시 살기’는 1세기가 지나도 지난함을, “돈이라는 건 눈부시게 빛나기도 하지만 그 빛에 눈이 멀기도 하”다는 잠언 또한 없는 자들의 망상에 불과함을 소설이 뒷맛처럼 남긴다. ‘광채’는 여전하고, 재웅조차 살아 서사의 재기를 노리니 말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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