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2 (토)

한국의 보물, 가을이 위태롭다[카를로스 고리토 한국 블로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가을이 마침내 찾아왔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더위 속에서 매일같이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에게 한국의 가을은 보물과도 같은 계절이며, 그 이유는 땅을 뒤덮는 황금빛 낙엽만큼이나 풍성하다.

동아일보

카를로스 고리토 브라질 출신 방송인·사업가


애국가를 떠올리면 가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사계절 중 유일하게 애국가에 언급된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이 계절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잘 보여준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나는 한국의 가을이 주는 감성에 늘 매료되어 왔다.

가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감나무다. 마치 붉은 등불처럼 나무에 매달린 감은 한국의 가을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다. 나는 브라질에서 태어났는데, 내가 자란 도시에는 사실상 가을이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한국어를 배울 당시 선생님들이 한국의 사계절을 설명할 때 난감해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은 가장 더운 계절, 겨울은 추운 계절, 봄은 꽃이 피는 계절로 쉽게 설명했지만, 가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선생님들은 “가을은 과일의 계절”이라고 정의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지면 나 역시 가을에 태어난 셈이다. 5월생인데, 한국에서는 봄이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반구에서는 5월이 가을의 한가운데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유독 감을 많이 먹었다고 말씀하셨다. 브라질에서 감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시장을 헤매며 감을 찾아다녔을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내가 한국에 와서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여기게 되고, 그 계절을 대표하는 과일이 감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운명적인 인연처럼 느껴진다.

가을은 자연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는 계절이다. 논밭이 황금색 물결로 변하는 모습은 한 해의 마무리를 알리는 동시에 우리를 성찰의 시간으로 이끈다. 바람에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가을은 추수를 앞둔 들판과 제철 특산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올해는 과연 가을이 온전히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을까? 최근 들어 9월까지도 여름 같은 더위가 이어지면서 우리가 알던 가을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단풍 예보를 보며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이들의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미리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했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운 단풍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최근에 이걸 느꼈던 것이 바로 전어였다. 한국 속담에 ‘가을 전어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 역시 예전 가을에 맛본 전어 맛이 두고두고 기억이 나 이번에도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전어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서둘러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많은 전어 축제가 대부분 여름에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이상기후가 이어지며 ‘가을 전어’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슬픈 이야기가 뒤따랐다.

점점 더 길어지는 여름과 혹독해지는 겨울 사이에서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선선한 바람과 청명한 하늘이 오래도록 이어지던 예전의 가을은 이제 희미한 기억이 되어가고 있다. 기후 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직접 체감하는 현실이 되었다. 자연의 변화는 단순한 날씨의 변덕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깊은 성찰과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우리가 남대문과 같은 문화재를 보호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한국의 아름다운 가을을 지키는 데에도 같은 열정을 쏟아보면 어떨까? 남대문이 국보 제1호로서 당연히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라면, 한국의 가을 역시 한국인들에게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가을은 그 자체로 자연이 만들어 낸 문화유산과도 같다. 매년 찾아오는 이 황금빛 계절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환경 보호와 기후 변화 대응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가을도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가을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자,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사랑하는 가을을 지키는 일과 다름없다. 올가을, 단풍놀이를 떠날 때 그 풍경 속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가을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작은 실천을 한다면, 이 황금빛 계절은 보물처럼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카를로스 고리토 브라질 출신 방송인·사업가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