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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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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만의 미투’…공개증언 나선 5·18 성폭력 피해자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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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30일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응답’에 참여한 피해자 최경숙씨가 44년 전 피해 증언을 마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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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얼룩무늬 군인 옷만 보면 견디질 못해요. 성폭행한 계엄군들이 생각나서…. 쌍둥이 아들한테도 ‘절대 군대 가지 말라’고 당부해 의경으로 제대했습니다.”



최경숙(71)씨는 1980년 임신 3개월에 겪은 성폭력 피해를 하루 전 일인 듯 생생하게 떠올렸다. 20대 시절 겪은 피해는 그의 전 생애에 얽혀 있었다. 최미자(62), 김선옥(66), 김복희(63)씨도 마찬가지였다. “울음 반, 말 반 해서 죄송합니다.” 최경숙씨가 눈물을 훔치며 말하자 객석에선 그를 응원하는 박수가 쏟아졌다.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응답’에서는 2시간 내내 눈물과 박수가 번갈아 터져나왔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등이 저지른 성폭력 피해자들이 300여명 앞에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채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1980년 당시 18살이던 최미자씨는 “아는 언니 집에 갔다가” 계엄군에 의해 강제추행을 당하고 대검에 가슴 부위를 찔려 폐까지 다쳤다. 최씨는 생리 직전 가슴이 불어 있는 상태에서 느꼈던 그때의 통증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40여년 동안 매달 생리하기 전 가슴이 멍울질 때마다 그때가 떠올라 힘들었습니다.” 그는 “남편에게 피해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웠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됐다”며 “이제 피해 당사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이런 피해 사실을 알려야 해서 증언대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2018년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성폭력 피해 사실을 38년 만에 밝힌 김선옥씨는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뒤) 나는 맨몸으로 던져진 느낌, 모든 사람이 ‘저 여자 성폭행당했대’ 이런 얘길 하는 것 같은 트라우마를 겪었다”며 “잊을 만하면 조사위 조사를 받아야 했고 그 스트레스로 난소암 판정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걸 후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내 삶에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았다면 내가 쏘아 올린 공이 열매를 맺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겨레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응답’에서 김선옥씨 등 피해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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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증언에 나선 피해자들은 지난해 12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의 ‘진상규명 결정’으로 국가 공권력의 임무 수행 과정에서 반인도적 범죄 피해를 당한 사실을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또다시 “마음속에 묻어두고 꺼내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증언”(김복희)하기로 용기를 낸 이유는, 국가 차원의 배상·보상과 명예회복, 치유를 위한 대책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다.



성폭력 피해자 26명은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보상법)에 따라 광주광역시에 보상을 신청했지만 적정한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5·18보상법 소관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지난 4월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도 기존 보상 기준(신체 장해 및 그 장해로 노동력이 상실한 정도에 따라 1~14등급 분류)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김경례 광주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는 이런 정부 조처에 대해 “성폭력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발상”이라며 “40년이 지난 지금 신체 장해 정도를 입증하기 어려운데다 국가폭력과 성범죄는 당사자와 가족에게 큰 정신적·사회적 고통을 남긴다”고 말했다.



5·18조사위에서 성폭력 사건을 조사한 윤경회 전 팀장도 “성폭력은 피해자 탓이라는 통념이 지금보다 강할 때 피해를 겪은 이들은 학업이나 경제 활동을 중단하고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하거나 결혼을 아예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영향을 반영하는 보상 기준이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 보상 기준은 실명, 팔다리 기능 상실 등 신체 피해 위주로 정신적 피해는 제한적으로만 반영돼 성폭력으로 인한 복합적 피해를 다룰 수 없다는 뜻이다.



피해자들은 지난 8월 ‘열매’라는 모임을 스스로 만들어 피해구제 등 후속 대책을 위한 법 개정 촉구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등 공동대응에 나섰다. 이날 증언대회에 함께 한 서지현 전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대응 태스크포스(TF) 팀장은 “5·18 성폭력 피해자 12명이 제 ‘미투’로 용기 내셨다는 연락을 받은 순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국가는 우리를 외면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살려냈구나 싶다”며 “국가의 역할은 이렇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에게 책임 있는 조치,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열매’ 대표를 맡은 김복희씨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이 되었음에 국가로부터 아무런 책임을 듣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회원들이 많이 있다”며 “이제 국가가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듬어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한겨레

30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응답’에 참여한 증언자들과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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