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7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에 대해 표결한 뒤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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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윤석열 탄핵을 외치러 광장에 모인 이들은 너무 다양하다. 형형색색의 야광봉, 무지개 은하수 같은 응원봉처럼. 어린이부터 노년,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성소수자, 백수와 연구자, 동물과 식물, 우주 행성까지 깃발로 휘날린다. 이토록 다양한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평등하게 존중되기를 바라는 요구라니. 영유아와 양육자를 위한 쉼터 버스가 도착했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는 기다가 누운 채 발언했다. 취약성과 연약성이, 그로부터 시작되는 저항과 연대가 자부심이 됐다. 화장실에는 나눔 생리대가 쌓였고, 옆자리 시민이 핫팩과 먹거리를 나눠 주는 일은 흔하다. 탄핵 광장 무대에 선 시민들은 대다수가 이렇게 인사하고 발언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성소수자, 비정규직, 이주민, 장애인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2024년의 민주주의다. 독재 폭군, 거악과 싸우는 단일 전선이 아니라 일상 속의 평등과 인권 감수성을 요구하고 돌보고 연대한다.
윤석열이 무장 군인을 독촉·동원하여 국회를 위협할 때 맞선 시민들은 맨몸이었다. 군인 개개인, 경찰 개개인과 고성으로 시비 붙기보다 법치로 통제하자고 광장에서 시민들은 합의했다. 적과 내가 군사주의적으로 싸우는 시대는 낙후된다. 우리 편은 단일하고 상대방도 단일하며 회색지대는 없어야 한다는 이분법적 전쟁관은 지금의 광장에 닿지 못한다.
불법적 위헌적 비상계엄령 선포가 있던 12월3일의 나흘 뒤인 12월7일 토요일 국회, 대통령 탄핵안은 그러나 부결됐다. 국민의힘이 당 차원에서 표결 참석을 비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 방침에 의해 퇴장했다가 본회의장으로 돌아와 탄핵 찬성표를 던진 의원이 있었다. 시각장애인이자 여성, 비례대표 김예지 의원이다. 김예지 의원은 비비시(BBC)와의 인터뷰에서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를 먼저 생각했다고 말했다. 야당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대리해야 하는 시민분들을 대신해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비상계엄령 당시 시각장애인인 김 의원은 물리적 배리어 앞에서 암담하고 절박했고, 계엄 선포 때 수어 통역도, 자막도 나오지 않아 청각장애인은 소식을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김예지 의원의 입장은 훌륭하기보다 당연하다. 전국 광장에 모여드는 시민들의 목소리와 그저 공명한다.
비상계엄은 명확히 잘못되었고 탄핵안이 가장 시급한 법치적 대안이며, 소수자가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민주주의 광장과 평행하다. 김예지 의원은 대리해야 하는 자의 위치에서 당대의 흐름 속에서 당연한 입장을 표했다. 보수는 단일해야 하고 당론과 다른 것은 배신이고, 상대의 이익에 영합하는 것이며, 용납될 수 없다는 세계관만 존재했다면 탄핵안은 가결될 수 없었다. 국민의힘 당권파와 골수 당원들은 2차 탄핵안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과 김예지 의원에게 탈당을 종용하고 배제하려 든다. 김예지 의원은 공존하지 못하겠다면 제명하라고 입장을 냈다.
민주진보 진영은 탄핵 광장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방식과 세계관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민중가요만이 아니라 케이(K)팝과 트로트가 집회 ‘플리’(플레이리스트)다. 성평등과 안전을 위한 수칙이 제공되며, 화장실과 이동통로 확보와 안내를 중시한다. 혐오나 차별 발언을 제한할 것임을 고지하고 참여를 이끌어낸다. 2024년 민주주의 광장이 요구하는 것이 또 있다. 민주진보 진영의 과다한 남성 대표성 해소, 진영을 보위하기 위해 내부 성폭력 문제 제기를 막는 행태에 대한 제재, 피해자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마녀사냥으로 배제하려 드는 조직적 2차 가해 중단과 책임 묻기이다.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피해자에 대하여 ‘대책’을 논의하던 여섯명이 모인 자리에서 피해자가 업무하던 중 썼던 비서로서의 손편지를 공유받았다. 이를 소셜미디어에 피해자 이름까지 유포해 성폭력처벌법상 유죄 판결을 확정받은 사람이 김민웅씨이고, 광장의 대표자가 되어선 안 된다. 성폭력 피해자는 특정 모습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성폭력 가해 행위자도 그렇듯이. 보수도, 진보도 특정 모습으로 영속되지 않는다. 혼란스럽게 돌아보는 진보, 떨리게 변화하는 보수, 용기 있게 소수자와 공명하는 시민이 2024년의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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