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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금)

푸틴 “핵무기 사용 규정 바꿔라”... 우크라 돕는 서방에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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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25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푸틴은 이날 러시아의 핵교리 변경을 주문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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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러시아 정부에 ‘핵 교리(핵무기 사용 규정)’ 개정을 공식적으로 주문했다. 핵무기를 갖지 않은 나라가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공격하는 것까지 핵보유국의 공격 행위로 간주해 핵무기로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특정 국가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을 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대하려는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수위가 높아질 때마다 핵 교리 개정 가능성 등을 언급하며 핵 위협을 해왔다. 그러나 푸틴이 직접 이를 언급하고 구체적 주문까지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과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장거리 타격 미사일의 사용 제한 해제 검토에 나서자,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의도란 분석이 나온다.

푸틴은 이날 러시아 국가안보회의에서 “우리는 현재 러시아를 둘러싼 정치·군사적 상황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며 “핵 억제에 대한 정책(핵 교리)은 그러한 현실에 맞게 조정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어서 두 가지 구체적 변경 내용을 제시했다. “비핵보유국이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공격하는 경우, 이를 두 국가의 공동 공격으로 간주할 수 있다”, 또 “러시아에 대한 미사일·항공기·무인기(드론)의 대규모 발사를 시작한다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있으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수 있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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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윤혜


더타임스 등 영국 매체들은 “이는 방어적 성격이 강했던 러시아의 핵 교리를 공격적으로 변화시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러시아가 핵공격을 할 수 있는 대상과 상황이 크게 확대되기 때문이다. 2020년 6월 발표된 기존 핵 교리는 핵무기를 보유한 교전 당사국을 핵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 하지만 푸틴의 언급대로 내용이 변경되면 러시아를 공격하는 나라가 핵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해당국뿐만 아니라 핵을 보유한 그 지원 국가까지 핵무기 공격의 대상이 된다.

기존 핵 교리는 또 러시아가 핵 공격을 받았을 때, 혹은 전면전 상황에서 적의 지상군에 의해 수도 모스크바가 위협받는 등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경우’에 한정해 핵 보복을 허용했다. 서방 언론들도 이 때문에 “러시아의 핵 교리는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해 왔다. 그러나 푸틴의 뜻대로 핵 교리가 바뀌면 대규모 지상전이 동반되지 않은 미사일과 드론을 이용한 공습 상황에도 러시아의 피해 규모가 크다고 판단될 경우 핵무기 사용이 가능해진다. 핵무기 사용 기준이 크게 완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핵 교리 변경은 사실상 우크라이나와 미국 및 나토 동맹국들을 겨냥한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미사일과 드론을 이용한 대규모 공습을 가할 경우, 우크라이나는 물론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한 국가들에도 핵 공격을 하겠다는 ‘위협’으로 파악된다. 러시아는 이전에도 미국과 서방의 우크라 무기 지원이 자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핵 교리를 개정할 수 있다’고 수차례 위협해왔다.

특히 우크라이나가 최근 미국산 ATACMS(에이태킴스)와 영국산 스톰섀도 등 장거리 타격 무기의 러시아 본토 타격 제한을 풀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고 미국이 “우크라이나 요청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자, 러시아의 반응은 더 격렬해졌다. 푸틴의 측근인 뱌체슬라프 볼로딘 러시아 국가 두마(하원) 의장은 “서방 미사일이 러시아를 공격하면 핵무기를 동원한 세계 대전이 뒤따를 수 있다”고,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그런 허가를 내준다면 서방은 러시아와 직접 싸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위협을 일축했다. 안드리 예르막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25일 “러시아는 더 이상 핵무기 외엔 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며 “이런 수단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매체들 사이에서도 “당장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가 직접적 핵 위협의 강도를 더 끌어올리면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미국과 나토 동맹국의 고민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푸틴의 위협은 장기적으로는 미국과 나토의 핵전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선 소련 해체로 독립한 뒤 친서방 국가로 전환을 추진해온 조지아와 몰도바에 대한 서방의 안보 지원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옛 소련의 부활을 꾀하는 푸틴의 러시아 확장 정책에 대한 대응도 어렵게 된다. 나토는 점증하는 러시아의 핵 위협에 맞서 유럽 내 핵 자산 추가 배치와 미사일 방어 체계 증강에 나서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양측의 군비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핵 확산’의 장이 열리고, 핵전쟁의 위험도 더 높아질 우려가 있다.

조선일보

그래픽=양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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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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