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인 ‘2대 고모’로부터 고모집을 인수한 72세의 ‘3대 고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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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지난 7월 11일. 15평이나 될까 말까 한 그곳에는 작은 등불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벽면에는 이 가게를 다룬 신문 기사와 방송 화면, 단골인 듯한 이가 쓴 시들이 걸려 있었다. 그 공간의 주인은 기자가 들어선 뒤에야 선풍기를 작동하고 환하게 불을 밝혔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고려대 정문 앞의 대표적 노포인 고모집 점주 김영선(67·여·가명)씨는 7월 초 단골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나 몸도 아프고 힘들어서 인제 그만 가게 접어. 얼마 안 남았으니 근처 올 일 있으면 꼭 들러.”
‘고모’로 불리는 그는 그 말대로 한 달 뒤 31년간의 영업을 끝내고 가게를 접었다. 얼마 전 쓰러져 3일 동안 의식을 잃은 이후 마음을 굳혔다. 그렇다고 고모집이 문을 닫은 건 아니다. 지난달 조정숙(여·가명)씨가 가게를 인수해 고모집 간판을 유지하면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72세로 김씨보다 나이가 더 많다. 한 노인은 살기 위해 자영업을 떠났고, 또 다른 노인은 살기 위해 자영업에 뛰어든 셈이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한국 자영업의 현주소다.
현재 자영업의 주류는 60대 이상 고령자다. 일이 좋아서일 리는 없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다. 이들은 김씨처럼 건강이 악화해서야 비로소 손을 놓는다. 1970년 개업한 고모집은 대표적인 고려대생의 주류 공급원이었다.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들이 이곳에서 막걸리를 들이켰다.
고모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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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넘어 막노동을 뛸 수도 없고… 돌고 돌아 또 밥장사
1대 고모 한은예(작고)씨가 1993년 가게를 떠난 것도 건강 때문이었다. 그때 김씨가 가게를 인수해 2대 고모가 됐다. 월 400만원 벌이는 쉽던 시절이었다. 단체 행사일이나 비 오는 날은 미어터졌다. 매출액과 외상값을 기록하던 장부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했다.
그러나 그는 장부 쓰기를 멈춘 지 꽤 됐다. 손님이 크게 줄면서 쓸 내용이 없어서다. 게다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고된 노동이 고령의 그를 잠식했다. 그는 손가락 두 개가 잘 안 움직이고, 팔을 들기도 어려운 상태다. 갑작스러운 졸도에서 깨어난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3대 고모가 된 조씨는 서울 북부 지역에서 선술집을 하다가 대학교 앞에서 장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고모집을 인수했다. 상권의 쇠락은 인지한 상태였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더 나빴다. 이달 초 기자와 만난 그가 푸념했다. “일주일 내내 손님이 없었던 적도 있어. 이거 아니면 먹고살 방도가 없는데
만족한사진관 윤갑식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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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서울 관악구 신림9동(현 대학동) 사진관 용칼라에 한 대학생이 들어섰다. 덩치가 컸던 그는 상대적으로 날씬한 또래 친구 2명과 함께 들어오더니 증명사진을 찍었다. 당시 갓 서른 즈음이었던 사진관 주인 윤갑식(70)씨는 “그 친구가 세 명 중에서 대장, 보스 같더라”라고 회고했다.
그가 그 학생을 다시 떠올린 건 몇 년 전이었다. TV에서 검찰총장 시절의 윤석열 대통령을 보면서다. “‘아, 저분이 그때 그 학생이었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
윤 대통령은 그동안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고 서울중앙지검장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고, 대통령이 됐지만 윤씨는 대학동에 그대로 있다. 사진관 이름(만족한사진관)과 나이만 변했을 뿐이다. 그는 고령 자영업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고교 졸업 후 충남 서천에서 상경한 그는 3년간 사진관 직원으로 일하다가 용칼라가 매물로 나오자 인수했다. 백화점 숙녀복 매장 운영이라는 단 한 번의 외도를 빼면 사진 외길 인생이다. “사진관으로 큰돈 벌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했는데, 숙녀복은 팔 때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야 해서 생리에 안 맞더라고.”
1997년 원점으로 돌아온 그는 지금의 상호로 사진관을 재개업했다. 공교롭게도 재개업 직후 외환위기가 터졌지만,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때 실직한 직장인들이 고시촌으로 많이 들어왔거든. 다들 내 손님이 됐지.”
하지만 증명사진과 여권사진 수요를 떨어뜨린 사시 폐지와 코로나 사태 타격은 피할 수 없었다. 조금 회복되긴 했지만 지금도 수입은 변변치 않다.
그는 아직 부부동반 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진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까 둘 중 한 명은 꼭 가게를 지켜야 했어.” 하물며 가족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큰애가 여행을 좋아하는데 데려가주지 못해서 미안하지.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한 게 가장 미안해.” 그의 목에 뭔가 걸린 듯했다.
그는 원래 일흔 살까지만 일하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 은퇴를 허용하지 않았다. “지금 너무 자금이 없어. 연금도 적고. 80세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때까지 노후에 살 거를 모아서 노후를 보낼 거야.”
변형식(60·가명)씨는 원래 월급쟁이였다. 출판사에서 일하던 그는 40대 후반이 되자 ‘직장인의 딜레마’에 빠졌다. 회사를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던 그는 적지 않은 또래들처럼 결단을 내렸다. 서울 서남부 지역에 차린 첫 가게는 주점이었다. 4년 뒤 그는 고기국숫집으로 업종전환을 했고 또다시 4년 뒤 프랜차이즈 덮밥집으로 재차 갈아탔다. 하지만 그는 비싼 수업료만 치른 채 지난해 1월 가게를 내놓았다.
“여기 월세가 330만원이고 전기요금이 70만원, 관리비가 11만원이야. 숨만 쉬어도 400만원이 나가.”
그러나 그의 가게는 아직 새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가게 보러 온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권리금 협상 단계에서 결렬됐다. 폐업 후 계획을 물었더니 한숨이 돌아왔다. “기자님, 내 나이가 60이잖아요. 막노동했다가는 약값이 더 많이 들 거야. 나 같은 밥장사는 사실 직업으로 보면 ABCD 중 D(최하 단계)인데 이거 그만두고 뭘 할 수 있겠어
■ ‘한국의 아킬레스건’ 자영업…51명의 슬픈 현실을 듣다
665만 자영업자가 벼랑 끝에 섰다. 소득의 추락, 과잉 경쟁과 과잉 노동, 원가 급등과 부채 급증이 그들을 옥죄고 있다. 자영업 문제는 한국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저출산·고령화·인구·복지·빈부격차·지방소멸 등 우리가 직면한 모든 논란거리가 자영업 문제에 결부돼 있다. 지체의 늪에 빠진 한국이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반드시 털어야 할 난제다.
중앙일보는 창간 59주년을 맞아 자영업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 기획 보도를 시작한다. 먼저 두 달간 발품 팔아 만난 자영업자 51명의 목소리를 토대로 5일에 걸쳐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도한다.
후속 보도를 통해서는 숨은 문제들을 발굴하고 국내외 정책들을 점검하면서 해법과 대안을 도출할 계획이다. 정치권과 정부의 각성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독자와 국민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특별취재팀=박진석·조현숙·하준호·전민구 기자, 사진 김현동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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