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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청담동 뒷골목 샌드위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풍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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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샌드위치

조선일보

서울 강남구 프레드므아 청담의 '프렌치 샌드위치'.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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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의 식사는 늘 별게 없었다. 육수를 끓이고 남은 닭고기 조각, 냉동실 깊숙이 있는 줄도 몰랐던 딱딱한 빵, 킬로그램 단위로 포장된 파스타, 당근이나 양파같이 싼 채소들을 긁어모아 어떻게든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 안에 담아냈다. 서양 친구들 특징이 쌀이나 파스타를 삶아 주방 식사로 낼 때는 대체로 성의가 없었다. 대충 밥이나 국수에 양념을 끼얹어 먹으면 된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샌드위치를 내는 날이면 몸에 힘이 들어갔다. 빵을 노릇하게 굽고 속에는 꼭 버터를 발랐다. 베이컨, 치즈, 햄 같은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꾹 눌렀다. 내가 ‘점심부터 웬 샌드위치?’라는 눈빛으로 빵을 손에 들고 있으면 저 건너편에서 선반 사이로 샌드위치를 만든 동료가 푸른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며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었다. 재빠르게 한 접시를 해치우고 엄지를 쳐들어 잘 먹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그제야 동료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빵 사이에 뭔가 끼워 넣으면 말 그대로 샌드위치가 된다. 하지만 빵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 빵과 빵 사이에 어떤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여 어떤 순서로, 얼마나 넣을지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나온다. 밤하늘에 뜬 별처럼 무수히 많은 샌드위치의 조합은 요리사에게 무한한 가능성이자 동시에 길을 잃기 쉬운 미로가 된다. 미식과 괴식의 경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저 멀리 고요한 북극성처럼 명징하고 부동한 오래된 조합에 의지하는 편이 낫다.

청담동 뒷골목에 자리한 ‘프레드므아’는 그 변치 않는 맛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검정으로 칠한 좁은 입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굴로 가는 통로 같았다. 그 검은색 계단을 타고 올라간 빵집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작은 테라스도 있는 빵집은 크지 않았다. 검정과 흰색으로 마감된 바닥과 금색으로 빛나는 진열대는 이유 있는 자신감을 조용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 자부심은 공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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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프레드므아'.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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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서는 프랑스산 유기농 밀가루와 국산 우리밀가루를 함께 썼다. 청담동 물가와 밀가루 원가를 생각하면 ‘이래도 괜찮나?’ 싶었다. 처음 손에 든 것은 ‘제철과일 샌드’였다. 생크림이 하얀 식빵 사이에 두꺼운 지층처럼 자리 잡고 그 사이에 알알이 과일들이 박혔다. 먼저 느껴진 것은 식빵의 촘촘하고 부드러운 결. 치밀하면서도 질기지 않고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느껴 보지 못한 경지에 있었다. 이름은 식빵이었지만 케이크를 먹는 듯했다. 안에 든 크림은 갓 짠 우유처럼 신선하고 단맛이 적었다. 과일은 무른 부분 없이 탄탄했고 신맛과 단맛이 고르게 갖춰져 있었다.

효모빵을 커다랗게 자르고 그 안에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양배추 절임인 ‘슈트루트’와 직접 만드는 소고기햄, 에멘탈 치즈를 넣었다. 시큼하고 고소한 러시안 드레싱은 재료와 재료 사이를 이으며 맛의 골조를 이뤘다. 늦가을 햇볕 아래 익어가는 밀의 풍미와 잠재력을 최대한 뽑아낸 효모빵은 들숨을 쉴 때마다 추수하는 들녘에 서 있는 듯했다. 짭짤한 햄과 양배추 절임, 쿰쿰한 치즈의 앙상블은 노련한 악단이 오래된 악기로 연주하는 왈츠처럼 고전적이면서도 감출 수 없는 생동감이 흘러나왔다.

주인장이 수줍게 추천한 마지막 메뉴는 ‘프렌치 샌드위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게트에 버터를 곱게 바르고 이 집에서 직접 만든 파테를 두껍게 잘라 올렸다. 그 위에는 루콜라 샐러드와 적양파, 작은 오이 피클을 넣었다. 다진 고기와 견과를 같이 섞어 오븐에서 구운 프랑스식 햄인 파테는 수줍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대륙의 낭만 같았고 사라지지 않는 전통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두툼한 빵 사이에 넣고 입안에 밀어 넣었다. 불시착하듯 홀로 내렸던 파리 작은 공항의 빵과 치즈 냄새, 좁은 주방 어두운 계단에서도 느껴지던 뜨거운 불기운, 그 계단 틈에서 어깨를 비비며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 먹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뜨겁고 그만큼 무도했다. 집도 절도 없었지만 빵 한 조각에도 힘이 났다.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뿐이었지만 그래서 자유로웠다.

#프레드므아: 루벤샌드위치 1만9000원, 제철과일 샌드 6000원, 프렌치 샌드위치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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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므아' 프렌치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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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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