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16 (월)

[유석재의 돌발史전] 한국 현대 정치사의 10가지 근본적 질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정치학자 한배호의 ‘자유를 향한 20세기 한국 정치사’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조선일보

1961년 5·16 당시의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육군 소장).


한국 정치사에서 얼키고설킨 수많은 난제(難題)들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던 학자가 얼마나 될까요. 더구나 한 주제도 아니고 여러 주제에 대해서 말입니다. 최근의 일일수록 ‘평가는 후세에 맡긴다’는 진부한 말을 하는 것도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명쾌한 답변’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고려대 교수와 세종연구소장,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낸 원로 정치학자 한배호 유한양행 이사장이 그 주인입니다. ‘자유를 향한 20세기 한국 정치사’는 2008년에 그가 낸 책이니 세월이 꽤 흘렀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 ‘10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했습니다.

조선일보

한배호 이사장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곱씹어볼 만한 대목들이 많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번호 아래의 글은 긴 원문을 제가 요약한 것이고, 저자 본인도 당시 기사를 보고 대체로 흡족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괄호 안은 지금 제가 다시 그 말을 생각해본 것입니다.

①식민 통치는 무엇을 남겼는가?

일제의 식민 지배는 우리에게 폭력적인 권위주의와 상하 위계적인 관료주의의 폐해를 남겼다. 일제의 근대화 개발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분열을 획책한 일제의 통치 방식은 반목과 불신의 유산을 남겼으며, 이미 극심한 이념 대립의 씨를 뿌렸다.

(이 간단하고 명쾌한 결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인하려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개발한 것은 조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인 것도 사실이고, 그 결과 조선이 개발된 것도 사실입니다. 두 가지 사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혹 그 때문에 마땅히 일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과 근대화 자체를 부정하는 시각 모두 납득할 수 없습니다.)

②38선은 왜 갈렸는가?

일본의 패망으로 극동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겨나자, 이를 채우기 위한 미·소 사이의 각축 속에서 하나의 타협으로 38선이 그어졌다. 그것은 루스벨트와 미국 정부의 조선에 대한 무관심, 안이한 대소(對蘇) 정책의 산물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 결정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한반도에 관심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없던 관심을 한반도로 기어이 돌린 미국 측 입장에서의 ‘관종’은 누구였을까요. 이승만 말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독재자 이승만’이 싫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사실입니다.)

③해방정국,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

해방 직후의 정국은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을 낳았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소의 대립 속에서 가장 실현성이 높다고 본 ‘남한 단독정부안’을 추구해 성공했다는 점은 평가 받아야 한다.

(이미 1946년 2월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 우상화를 하고 있던 판국에 선택지는 안타깝지만 두 가지 뿐이었을 겁니다.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워 통일을 도모하느냐, 아니면 이미 세워진 북한 정권에 남한도 흡수되느냐.)

④6·25 전쟁은 왜 일어났나?

최근 공개된 소련·중국측의 자료는 ‘김일성이 계획하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얻어 남침을 감행한 전쟁’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것은 무력에 의한 ‘침략 전쟁’이었고,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은 한반도를 공산화해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

(1990년대만 해도 북침을 주장하는 사람이 국내에도 그렇게 많았는데, 그리고 ‘남침이 맞냐 북침이 맞냐’고 교수님께 물어보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는데, 소련 해체 이후 쏟아진 문서들에 의해 다시 남침이 확고한 사실로 굳은 것을 보니 진실은 결국 드러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⑤4·19는 누가 왜 일으켰나?

고등교육에 의해 형성된 학생들의 도덕적 기준이 위정자들의 정치 행위와 너무 거리가 멀었고, 교육과 신분의 불일치에서 생겨나는 좌절감도 커졌다. 여기서 의분을 느낀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배후세력이 선동하거나 새로운 지배체제로 바꾸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고등학교 교과서들에는 1950년대 남과 북이 모두 독재체제였다며 ‘그놈이 그놈’이란 서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북은 완전히 다른 체제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4·19의 주역들은 결국 자유민주주의를 위반한 부정선거를 그냥 보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북한에선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⑥5·16은 왜 일어났나?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장교 집단의 불만이 팽배한 반면, 장면 정부는 부패한 상급 장교를 숙청하려는 군부 내의 정군운동을 반대했다. 여기에 정치·사회적 혼란이라는 외부적 자극이 생겨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3공화국 정부는 경제 근대화를 위해 국가의 자원과 능력을 동원하려는 ‘개발주의 국가’의 모습을 띠게 됐다.

(결코 우파라고는 할 수 없는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최근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민당 세력은 이승만을 종이호랑이 정도로 생각했다가 정부 수립 뒤 배척당했는데, 그들의 후신인 민주당 세력이 5·16 때 권력을 잃은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의지의 부재’였다.”)

⑦박정희 개발주의 국가가 이룩한 것은?

박정희 정부는 단기간에 획기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 냈지만,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억제한 채 이뤄진 경제개발이었다. 또한 무엇을 위한 경제개발인가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보여주지 못했고, 더 자유롭고 개방된 정치 질서의 창출에 실패했다.

(과연 1960~70년대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잘 살고 싶다’는 욕구 외에 ‘어떻게 잘 살고 싶다’ ‘어떻게 여가선용을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욕구가 얼마나 있었겠느냐는 반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파이를 일단 구워 놔야 어떻게 자를지, 토핑은 어떻게 할지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⑧유신체제는 왜 붕괴했나?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양쪽에 모두 해당되지 않았던 권위주의 체제였고, 그 때문에 확고한 정당성이나 이념을 갖추지 못했다. 여기에 지식인층이 등을 돌리고 지배 연합 세력이 내분을 일으킨 결과 체제 말기에는 권력의 동맥경화증이 나타났다.

(그 비정상적인 유신체제가 그래도 중화학공업화를 달성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뤘으니 그때 유신체제하에서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살았던 국민들은 후세를 위해 살신성인한 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⑨한국의 민주화는 어떻게 달성됐나?

민주화는 1980년대 말에 정치 세력들이 협상을 토해 도달한 전략적 선택이었으나, 그 동안 한국 사회가 겪은 ‘근대화’ 과정이 한국의 사회구조를 바꿔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산업화와 통신·교통의 발달, 중산층의 성장이 민주화의 요인들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6공화국 헌법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 3인이 차례로 대통령이 될 경우 마지막 순번이 임기를 마칠 시점이 만80세 이전이 되도록 ‘설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⑩21세기 한국정치의 과제는?

(1)확고한 정당정치를 기반으로 한 책임정치 (2)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정부 형태의 확정 (3)자율성을 지닌 시민사회의 형성 (4)세계화·정보화 시대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국민이 적절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지도층을 배출해야 한다.

(4번 말고는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요.)

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유석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