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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열린마당] 폭염 취약계층 위한 ‘오아시스’ 늘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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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위험 사회’에서 내세운 통찰은 전 인류에 닥친 위협의 특성을 명징하게 드러냈고, 이 말은 반핵, 환경운동 진영에서 세간의 인식 전환을 촉구하는 데 효과적으로 인용되었다. 하지만 기후재난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폭염’ 앞에서는 조금 결이 다르다.

수은주에 기록되는 기온이야 누가 재더라도 같겠지만 그 더위를 이겨낼 수단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냉방시설이 갖춰진 공간에서 잘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2012년 우리나라에서 온열 질환 사망자로 인정된 12명 중 집에 에어컨이 있는 사람은 1명뿐이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폭염이라는 재난을 온전히 피할 수 없더라도 폭염이라는 기후조건이 사회재난으로 작용하는 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계일보

오승록 노원구청장


유명하게 언급되는 모범 사례가 있다. 1995년 시카고를 덮친 폭염에 700여명이 온열 질환으로 사망한 후 희생자들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꼼꼼하게 조사한 당국은 인종, 연령, 빈곤율에 따라 피해 수준에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했고, 폭염 쉼터와 쉼터로의 이동 수단 제공 등을 설계했다. 그 결과 4년 후 비슷한 수준의 폭염이 다시 발생했을 때 사망자는 110명으로 크게 줄었다.

2018년 7월의 서울은 지금도 회자될 만큼 뜨거웠다. 동시에 민선 7기 초선 구청장 임기의 시작이었다. 경로당이나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무더위쉼터는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쉼터의 숫자보다는 쉼터가 문을 닫는 야간의 열대야를 피할 곳과 그곳으로 올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구청 강당을 포함한 24시 무더위쉼터를 설치하여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저소득 어르신들을 모셔왔다. 당시 행안부 장관이 직접 현장을 살필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폭염 대책은 2020년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코로나19로 쉼터 이용이 주춤할 때 집에 머무를 수 없는 이들은 공원에 몰렸고, 그다지 시원하지도 않은 그늘에서 많은 땀을 흘려야 했다. 이들을 위해 전국 최초로 ‘힐링 냉장고’를 설치하여 주민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제공한 것이다.

올해로 5년째 힐링 냉장고는 에어컨이 없는 곳을 돌아다니는 주민들 손에 쥐여진 작은 오아시스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사이 힐링 냉장고의 아이디어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것은 물론이다.

전국 지자체의 폭염 대책에 힐링 냉장고가 확산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늘막부터 쉼터와 생수 배부와 같은 폭염 대책 인프라에 지역별 빈부 격차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은 마음 아프다. 폭염 재난이 연령, 사회계층뿐 아니고 지역에 따라서도 차별적인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잠시 감소했던 폭염 사망자가 2023년에는 크게 늘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야외활동이 늘어나는 속도를 우리 사회의 대응이 쫓아가지 못한 결과다. ‘불평등한 사회재난’으로서의 폭염을 바라보는 정책의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최근 보건의료 학계에선 기후재난 앞에서 취약계층을 구체화하는 연구가 속속 나오고 있다. 폭염에 취약한 사람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일선 지자체가 잘 안다. 학계와 지역의 자원을 엮어 다가올 내년 여름을 대비하는 정부 차원에서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해지는 올여름의 끝자락이다.

오승록 노원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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