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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아빠, 그냥 18평 살면 안 돼?”…'한국이 싫어서’ 떠난 고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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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조선일보

배우 고아성. /엔케이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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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벌써 25년 차 ‘중견’ 배우가 된 고아성. 괴물에게 잡혀간 중학생, 빙하기 지구를 달리는 설국열차에서 태어난 소녀, 기업의 비리를 파헤치는 사원, 유관순 열사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온 그가 이번에는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떠나는 20대 청년 ‘계나’가 되어 관객 앞에 섰다.

28일 개봉한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베스트셀러인 장강명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2015년 책 출간 후 9년 만에 영상으로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지난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개봉 전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계나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직장과 가족, 남자친구를 뒤로 하고 홀로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장건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배우 김우겸(지명 역), 주종혁(재인 역) 등이 출연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아성은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고아성은 처음 시나리오를 받은 뒤 “이 영화를 꼭 해야 한다. 놓치면 영영 후회하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는 “제안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마침 서점 근처에 있어서 원작 소설을 바로 구매했다. 책을 먼저 재밌게 읽고, 다음날 시나리오를 연달아 읽었다”며 “감독님이 어떤 부분을 영화화하고 싶었는지가 보이더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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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이 싫어서' 속 한 장면. /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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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의 앞에 놓였던 시나리오에는 ‘수정 35고’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수정을 거쳐 현재의 결과물이 나왔다. 고아성은 “장건재 감독님과의 첫 미팅 때 ‘35번 수정이 정말 힘드셨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재밌었다’고 하더라. 그 모습에 믿음이 갔다”고 했다.

그는 “사회초년생의 결기나 열정을 잃은, 직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20대 후반의 지친 상태를 나타내보고 싶었다”며 “그 이전의 나이대와 모습들은 전 작품들에서 많이 해봤었다. 피로감을 겪는 20대 후반의 모습을 담는 게 저의 가장 큰 목표였다”고 했다.

극 중 계나는 한국의 살을 에는 추위, 아등바등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가정 환경, 가족·연인·친구·직장동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을 뒤로 하고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의 주변엔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계나의 오랜 연인인 지명도 그중 하나다.

고아성은 “계나에게 공감하고, 연기하겠다는 생각은 분명했지만 그를 반대하는 지명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 점을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보는 분들의 의견도 팽팽히 나뉘었으면 좋겠다. 양쪽 의견 모두 설득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며 “그 말을 듣고 계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연기하는 데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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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이 싫어서' 속 한 장면. /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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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계나와 뉴질랜드에서의 계나는 분명 한 인물이지만 극명히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피부톤과 옷차림은 물론이고, 표정과 자세도 다르다. 한국의 계나가 피부와 마음에 닿는 추위에 시종일관 몸을 움츠리고만 있었다면, 뉴질랜드의 계나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넓은 보폭으로 이곳저곳을 자유로이 누빈다. 이러한 ‘디테일’을 살린 연기는 고아성의 강점으로도 꼽힌다.

그는 “그런 부분을 많이 신경 썼다. 계나의 시간과 감정 흐름이 너무나 중요한 영화여서, 매 신(scene)을 뒷받침하는 감정을 연기하는 게 중요했다”고 했다. 그는 또 계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교포 스타일 메이크업과 태닝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자신을 옥죄던 틀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아 나선 계나와 한발짝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는 “배우 활동을 하면서 피부가 타면 안 된다, 하얀 피부를 유지해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한 번 태닝을 하니까 더 자유로워지는 부분이 있더라”라고 했다.

고아성은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로 “아빠, 그냥 18평에 사시면 안 돼요?”를 꼽았다. 아파트 재개발을 앞두고 부모가 24평 입주를 희망하며, 딸 계나의 금전적 도움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나온 대사다. 고아성은 “계나를 꼭 연기하고 싶었던 이유다. 정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대사”라며 “내가 그동안 모은 돈을 한국이 떠나는 데 쓰겠다, 그래도 내 살길 찾아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신을 찍을 때 정말 긴장을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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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이 싫어서' 속 한 장면. /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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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촬영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몇 개 전했다. 고아성은 “촬영 당시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다”며 “주택가 골목을 걸어가는 신을 찍을 때, 우리나라가 득점해 함성이 터졌다. 그때 제가 반응을 해버려 NG가 났다”고 했다. 이어 “그날 정말 기분이 복잡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영화를 찍지만 애국심으로 대한민국 선수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며 웃어보였다.

또 하나는 뉴질랜드 촬영 당시 생긴 일이다. 넓은 공원에서 이민 가방을 들고 큰 소리로 우는 장면을 찍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고아성은 “어떤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보고 걱정을 하며, 스태프에게 ‘쟤 울고 있는 거니? 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라며 “연기에 집중하느라 반응을 하지는 못했지만 너무나 감동받았다”라고 했다.

고아성은 “최근에 한 관객이 써준 리뷰를 봤다. ‘고아성이 찍은 영화는 믿고 본다. 배우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고아성이 귀신같이 내 취향의 영화를 고른다’는 내용이었다”라며 “그분을 알지는 못하지만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분이 이 인터뷰를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그분의 어렴풋한 취향을 쫓아가려고 노력하겠다”고 재치 있게 덧붙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 다양한 모습의 청춘들이 나온다. 계나든 재인이든 지명이든, 어떤 다양한 종류의 청춘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작은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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