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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대학 연구자 급여 쥐꼬리…닭장같은 연구실서 혁신 싹트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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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인이 떠난다 ◆

매일경제

"저는 나름 한국에서 인정받는 연구자였습니다. 연구비를 많이 지원받고 근무하는 학교에서 연구 공간을 더 할당해주는 등 배려도 받았지요. 그런데도 제 학생들은 닭장 같은 공간에서 일할 수밖에 없더군요. 이런 환경에서는 혁신적인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최태림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재료공학과 교수(47·사진)의 이야기다. 그는 2022년 국내 최고 대학인 서울대의 교수 자리를 박차고 스위스 ETH로 적을 옮겼다. 국내 대학 강의를 위해 한국을 찾은 최 교수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원생들에 대한 한국의 연구 여건은 너무 열악하다"며 "이대로 가면 한국 과학계는 큰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1999년 KAIST에서 학사,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 제일모직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2008년부터는 서울대 화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화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차세대 연구자다. 다양한 고분자 합성법을 개발하고 이를 응용한 연구를 해왔다. 과학기술 석학 기관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선정한 차세대과학기술한림원 회원으로도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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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연구자다. ETH에서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다. ETH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 톱 수준에 위치한 학교다. 영국 QS랭킹에서는 세계 7위를 차지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양자기술 석학과의 대화 시간을 위해 지난해 1월 ETH를 찾기도 했다. 최 교수는 "고분자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는 많다"며 "저는 활용보다는 고분자를 어떻게 합성할지를 연구하는 기초연구자"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최 교수는 한국을 떠난 이유에 대해 "한국에서 나름 많은 연구비를 받아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기초연구자로서 한국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9년간 총 8억원을 지원받는 사업에 선정됐고, 학교에서도 다른 교수들에 비해 넓은 연구 공간을 할당받는 등 많은 혜택을 봤다.

그럼에도 최 교수의 대학원생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등 20여 명이 좁은 공간에 몰려 120㎝ 너비의 책상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다"며 "닭장에 갇혀 연구를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들에 대한 대우도 높여줄 수가 없었다. 최 교수는 "8억원을 받았지만 간접비를 떼고 나면 실제 쓸 수 있는 돈은 6억원 정도로, 많은 돈을 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생과 박사후연구원들에 대한 대우는 곧 교수의 연구 경쟁력과 직결된다. ETH에서는 당장 학생과 박사후연구원들이 쓰는 공간이 2배로 늘어났다. 책상 너비도 180㎝로 넓어졌으며 최 교수에게 할당된 연구 공간도 서울대의 약 3배다. 박사후연구원에게 주는 급여는 한국보다 약 3.5배 높일 수 있었다. 최 교수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에게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학생이나 박사후연구원들의 수준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연구개발 예산 삭감 사태는 그에게 한국을 떠나는 일이 옳은 결정임을 더 확신케 하는 사건이었다. ETH에서는 일정 연구비를 보장해준다. 최 교수는 "한국에서 정교수인 연구자도 미국 주립대 수준에서 제의가 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며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떠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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