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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투사’ 해리스 “싸우자, 우리는 뒤로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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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22일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시카고/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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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서 싸웁시다! 가서 투표합시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2일 밤(현지시각)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싸우자’(fight)는 말로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마쳤다. 그는 ‘싸우자’는 말을 13차례 쓰며 나라의 미래, 자유, 민주주의, 중산층, 임신중지권, 세계적 주도권 유지를 위해 투쟁하겠다고 했다. 극복할 대상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확실히 지목했다. ‘투사 선언’처럼 들렸다.





“나라의 삶이 달린 가장 중요한 선거”





전당대회장인 실내경기장 유나이티드센터를 꽉 채운 청중의 환호 속에 후보 지명을 수락한 해리스는 19살에 홀로 미국에 온 어머니와 자메이카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성장사로 연설을 시작했다.



자신은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도 너를 멈추지 못하게 하라”며 딸을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로 만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해리스는 이어 “미국의 성공에는 항상 강력한 중산층이 핵심이었다”며 감세 등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국정 기조로 제시했다. 또 “우리의 높은 열망을 중심으로 우리를 통합시키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미국의 이상 추구와 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에 대해서는 연설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 절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인물로 규정하며 자신과 대비시켰다. 그는 트럼프 때문에 “이번 선거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일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우리 나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들 중 하나”라고 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의 “혼란과 재난” 그리고 2020년 대선에서 졌을 때 발생한 의사당 난동 사태를 거론하면서 “그는 가드레일이 없다”, “그들은 한마디로 정신 나갔다”고 했다. 또 “사기에 대해 유죄 평결을 받았다”, “성적 학대에 대해 배상 판결을 받았다”며 트럼프의 법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끄집어냈다.



반면 자신은 초임 검사 때부터 어린이와 여성 등 약자들을 지지해왔다며 “평생 내게는 단 하나의 고객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 자신이라는 단 하나의 고객을 위해 봉사한다”고 했다. 해리스가 트럼프가 집권하면 임신중지권, 복지, 총기, 성소수자, 기후 위기 등의 문제에서 심각한 후퇴가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뒤로 가지 않겠다”고 외치자 청중이 큰소리로 따라 외쳤다.



해리스는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군사력”을 유지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 동맹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또 “우주와 인공지능(AI) 분야 등에서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 세계를 이끌게 하겠다”며 “미국의 지도력을 버리는 게 아니라 강화하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외교를 비난하면서는 “난 트럼프를 응원하는 김정은 같은 폭군이나 독재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겠다”고 했다. 또 “그들은 아첨과 호의로 트럼프를 조종하기가 쉽다는 것을 안다”며 “그들은 트럼프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독재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임을 안다”고 주장했다.



가자 전쟁과 관련해서는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언제나 지지하겠”지만 “가자에서 발생한 일은 너무 파괴적”이라며 휴전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해리스에 앞서 마이크를 잡은 전당대회 마지막날 연사들의 주요 역할들 중 하나도 ‘인권 옹호자 해리스와 범죄자·인종주의자 트럼프’라는 구도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1989년 ‘센트럴파크 파이브’ 사건 주인공 4명이 연단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센트럴파크 파이브’ 사건이란 1989년 흑인과 히스패닉계 10대 5명이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던 백인 여성을 성폭행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힌 죄로 징역 10년 안팎의 형을 살다가 진범이 나타나 누명을 벗은 사건이다. 인종적 편견으로 무고한 소년들의 삶을 파괴한 대표적 인종차별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당시 트럼프는 우리의 처형을 요구하는 8만5천달러짜리 전면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실었다”며 그를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만든 대학을 사기 혐의로 수사한 이를 비롯해 전직 검사들도 연단에 서 그의 불법행위를 나열했다. 한 전직 검사는 “트럼프는 1970년대에 흑인들에게는 아파트를 임대해주지 않다가 소송을 당했다”고 했다. 반면 해리스는 검찰청장 등으로 일하면서 “모든 사람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갖게 해주려고 노력”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해리스는 이번 선거를 ‘전직 검사 대 범죄자’의 대결로 규정한 바 있다.





성공적 출정식, 희망적 숫자들





이날 전당대회장은 대통령 후보 교체 후 승리 가능성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희망을 품은 지지자들로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만3천여석 규모의 실내경기장은 자리가 모자라 수십 개 출입구에도 사람들이 들어찼다.



인파가 너무 몰리자 현관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민주당원 데이비드 조던은 대회를 지켜본 느낌을 묻는 기자에게 “이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직에서 물러나기 전만 해도 “승부가 저쪽으로 기울어” 절망적이었다고 했다. 지난달 공화당의 밀워키 전당대회도 트럼프의 승리를 확정이라도 한듯 들뜬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하지만 민주당원들이 시카고에서 뿜어낸 열기는 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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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풍선 10만개가 대회장 천장에서 내려오고 있다. 시카고/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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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당 전당대회가 형식상 가장 큰 차이를 보인 대목은 찬조 연설자 면면이다. 공화당 쪽이 사실상 트럼프의 독무대였다면 민주당 쪽은 전현직 대통령(조 바이든,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부부가 출동해 후보를 중심으로 강하게 단결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런 모습은 대회 기간 내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대선이 70여일 남은 시점에 괜찮은 컨벤션 효과를 거둔 것이다. 10월이면 만 100살이 되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손자를 보내 그 나이를 채우려는 이유는 “해리스에게 투표하고 싶어서”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선거는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22일 현재 각자 기준으로 여론조사 결과들을 평균한 수치를 내는 기관들의 데이터는 일제히 해리스의 우위를 보여주고 있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는 48.3%-46.7%, 뉴욕타임스는 49%-47%, 더힐은 49.2%-46.7%, 파이브서티에이트는 46.9%-43.7%로 그가 트럼프를 앞서고 있다. 분명히 패한 2020년 대선 결과를 놓고도 자기가 이겼다고 계속 우기는 트럼프조차 “내가 앞서기는 하지만 많이 앞서지는 못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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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부통령이 순식간에 대통령 자리를 기대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것은 모든 행운이 그를 향하는 것 같은 상황 전개 덕도 크다. 대표적으로 바이든의 후보직 사퇴 시점이 절묘했다.



미국 대선은 11월 선거를 앞두고 여름에 열리는 양당 전당대회 뒤 야당 후보 지지율 상승폭이 더 큰 경우가 많았다. 이미 지지율이 바이든을 앞서던 트럼프는 공화당 전당대회 개막 이틀 전 유세 중 총격으로 귀에 피를 흘리면서 “싸우자”고 외치는 장면이 언론을 장식했다. ‘트럼프 대세론’은 쇠처럼 단단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하고 사흘 만인 지난달 21일 바이든이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트럼프는 컨벤션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해리스가 뉴스의 중심이 됐다.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 인선도 해리스에게 유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에이피(AP) 통신과 시카고대 여론연구센터가 한 조사에서 민주당 후보 팀 월즈 주지사와 공화당 후보 제이디(J.D.) 밴스 상원의원에 대한 호감 여론은 36%-27%였다. 비호감 여론은 25%-44%로 밴스에게 크게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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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바이든 징크스 극복이 과제?





폴리티코는 해리스의 상승세에 대해 “이렇게 선거운동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후보는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처럼 단기간에 지지도를 끌어올리고 선거자금 수억달러를 모은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상승세가 유지될 경우 전당대회 첫날 찬조 연설을 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바이든의 징크스를 피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힐러리는 2016년에 트럼프에게 득표수로는 약 287만표, 득표율로는 2.1%포인트 앞섰지만 확보한 선거인단 수가 227명 대 304명으로 차이가 나 고배를 마셨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후보를 선택해온 러스트벨트의 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주를 잃은 게 컸다. 해리스는 이번 전당대회 둘째 날에는 시카고에서 차로 1시간30분가량 떨어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유세를 했다. 힐러리의 악몽 재연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주별 승자독식 선거 제도라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공화당 세력이 강한 내륙의 인구가 적은 주가 상대적으로 과다 대표되기 때문이다. 2000년에도 민주당의 앨 고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보다 54만여표를 더 얻고도 백악관에 들어가지 못했다. 민주당 후보는 득표수가 약간 많은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다.



트럼프와의 텔레비전 토론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은 바이든의 악몽도 피해야 한다. 트럼프는 “해리스는 무능해서 인터뷰를 못 한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 토론이나 즉석 질의-응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큰 약점이다. 일부에서는 해리스가 준비된 원고에만 의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배경에는 실언 파문이 있다고 본다.



그는 2019년 민주당 대선 경선 참여를 선언한 직후 시엔엔(CNN) 행사에서 민간 의료보험을 폐지하겠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해 구설에 올랐다. 2021년에는 부통령이자 무단 월경 문제의 근본 원인 해결에 관한 주무자로서 한 엔비시(NBC) 인터뷰에서 실수를 범했다.



그는 왜 멕시코 국경에 가보지 않았냐는 질문에 “우리는 가봤다”고 답했다. 곧 진행자가 가지 않은 게 맞다고 지적하자 웃으면서 “난 유럽도 안 가봤다”고 답해 큰 비판을 받았다. 이후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꺼린 그는 토론과 인터뷰 훈련을 받으며 이번 선거를 준비해왔다. 트럼프의 ‘기대’가 들어맞을지는 해리스가 이달 중 하겠다고 밝힌 언론 인터뷰와 다음달 10일 양자 텔레비전 토론 때 판명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에게 물려받은 가자지구 전쟁이라는 부담도 안고 가야 한다. ‘해리스를 지지하는 무슬림 여성들’이라는 단체는 21일 이스라엘인 피랍자 가족은 연단에 서게 하고 팔레스타인인은 배제한 것에 항의하며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시카고/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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