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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장은수의 책과 미래] 내다보는 눈과 열린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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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무더위 속에서 책을 읽는다. 다행히 아파트 저층 창밖은 온통 나무에 덮여 에어컨 없이 지낼 만하다. 처음 이 집에 올 땐 가는 나무뿐이었는데, 어느새 우람해져 작은 숲을 이루었다. 그 덕분에 잎 많은 여름엔 서늘하고, 잎 마른 겨울엔 따스하다. 창밖을 볼 때마다 성냥개비 같은 애나무를 심으면서 숲을 상상한 건축가의 시간을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 곁엔 수십 년 후를 내다보면서 앞날을 디자인하는 이가 있다. 나는 얼마나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살고 있을까.

토머스 서든도프 호주 퀸즐랜드대 교수의 '시간의 지배자'(디플롯 펴냄)에 따르면, 미래를 내다보는 힘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다. 예지력이 없다면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지도, 그에 따른 기회와 위험을 사전에 대비하지도 못한다. 내일을 모르는 삶, 전면적 불확실성은 끔찍한 지옥과 같다. 무엇이 최선인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하늘의 별이나 바람의 움직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신들의 지식을 추출하는 일"(키케로)이다. 인류는 진화의 길 위에서 "마음의 눈으로 시간을 가로지르는 놀라운 힘"을 얻었다. 그 힘을 상징하는 존재가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보는 자'란 뜻이다. 그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불은 마음의 안개를 밝히고 앞날의 어둠을 거두는 불이었다. 물론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다. 과식은 성인병을 부르는 걸 빤히 알면서도, 먹을 걸 보면 일단 손을 뻗는다. 비극 작품엔 신들의 지식을 무시하는 인간의 오만과 미망, 도전과 파멸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시간을 지배하려면 예지를 올바로 쓰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 출발은 겸손이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확실한 미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플랜 B를 생각지 않는 인생은 아주 작은 변화에도 파멸할 수 있다. 자기 패를 과신하는 도박꾼들이 항상 파산하듯이 말이다. "인간은 최선을 희망하지만, 최악을 준비하는" 존재여야 한다. 미래가 내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숙고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그러려면 유연하고 개방적인 인지 장치가 필요하다. 가령 출신과 신분과 성향이 각각 다른 이들이 한 팀을 이루어 미래를 내다보면 예측력이 좋아진다. 왕정이나 귀족정보다 민주 정치가, 온갖 사람이 모여드는 도시가, 그중에서도 다민족·다인종 공동체가 더 창조적인 이유다. 다른 목소리의 존재는 시간의 흐릿한 지평선에서 기대를 보완해 우리가 미지를 더 잘 다루게 이끈다. 내다보는 눈은 열린 귀와 짝을 이룰 때 비로소 온전히 작동하는 셈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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