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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도시로 유학 간 딸, 100일 만에 '시신 2000점 조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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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콜드케이스]
<85> 중국 난징대 시신 훼손 살인 사건
1996년 시내 5, 6곳서 사체 조각 발견돼
희생자는 '20세 농촌 출신' 댜오아이칭
과학적 수사기법 한계로 초기 수사 난항
공안 "공소시효 관계없이 계속 쫓을 것"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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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쑤성 난징 시내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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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19일 중국 장쑤성의 성도 난징에는 눈이 내렸다. 이른 아침, 도시의 중심 상업지구 신제커우 거리에 버려진 가방 하나가 한 청소부의 눈에 띄었다. 가방을 열어 보니 익힌 고기 수백 점이 가득 들어 있었다.

'웬 횡재람!' 청소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가방을 집으로 챙겨 갔다. 오랜만에 식탁 위에 고기 반찬을 올릴 생각에 한껏 들떴다. 고깃더미 사이에서 손가락 조각 3개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교한 칼질로 도려낸 조각들은 다름 아닌 '인육'이었다.

경찰에 첫 신고가 접수된 이후 같은 달 31일까지, 이런 시신 조각은 난징 시내 곳곳에서 발견됐다. 난징의 역사를 품은 다리인 샤오펀치아오 인근 주택가, 난징대 정문 근처 도로 및 체육관 등 캠퍼스 안팎에서 시신 조각이 가방에 담긴 채 여럿 발견됐다. 난징대와 조금 떨어진 쉐이조우강 지역의 쓰레기통에서는 침대 시트에 싸인 신체 부위도 발견됐다. 2,000여 점으로 잘게 조각난 시신은 본래 '주인'의 형체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 등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은 일부 부위,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빨간 코트 등이 속속 발견되면서 희생자 신원이 드러났다.

대입 100일 '평범한 새내기'에게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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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중국 난징에서 처참히 살해된 채 발견된 댜오아이칭의 생전 모습. 바이두 캡처


1976년생인 피해자 댜오아이칭은 중국 장쑤성 타이저우시의 농촌 마을에서 난징으로 유학을 간 지 100여 일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중국 내에서는 '난징대 시신 훼손 살인 사건'으로 불리지만, 사실 아이칭은 대학교 학부생이 아니라 정보관리학과 컴퓨터 응용 분야의 단기 성인 교육 과정을 수강하는 학생이었다. 대학 입시에 두 차례 응시했고 난징대에 3점 차로 불합격하긴 했으나 가까스로 얻은 배움의 기회였다.

하지만 난징에 터를 잡은 지 고작 3, 4개월 만에 변을 당하고 말았다. 아이칭이 이렇게 잔혹한 범죄의 희생양이 될 만큼, 주변에서 원한을 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애정 문제에 연루된 일도 없었고, 큰 재산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지인들은 그를 '평범한 친구'로만 기억했다. 사교적이지 않았기에 인간관계가 넓지도 않았다. 피해자를 특정한 경찰은 광범위한 수사에 돌입했으나, 수사망을 좁힐 수 있는 범행 동기 추정 단계부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아이칭의 마지막 행적은 시신 발견 9일 전인 1월 10일 저녁이었다. 같은 기숙사에 살던 여학생이 학교 규정을 위반하고 전자기기를 사용했는데, 기숙사장이었던 아이칭은 함께 처벌을 받는 바람에 기분이 상했다. 산책을 위해 바깥으로 나가기 전 아이칭은 침대 위에 이불을 펼쳐 뒀다. 누가 봐도 금방 돌아올 듯했지만, 그는 기숙사로 복귀하지 못했다. 아이칭은 캠퍼스 인근 거리에서 목격된 뒤 '2,000점 이상 토막 난 상태'로 발견됐다. 캠퍼스 밖에서 표적 살해를 당한 것이라는 추정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난징대 전교생 모두 수사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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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대 정문. '난징대 시신 훼손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중국 누리꾼이 당시 사건 현장을 직접 가 봤다며 온라인에 올린 사진이다. 바이두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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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즉시 전담 수사팀을 난징대에 배치했다. 경찰력을 총동원해 인근 주민 대부분을 신문하며 3개월간 광범위한 조사를 벌였다. 난징대 학생 전원은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밝혀야만 했다. 아이칭의 관계망 안에 있는 모든 인물에게서 혐의점을 찾기 힘들자, 경찰은 '무차별 범죄'에 무게를 싣게 됐다.

당시 수사관의 2008년 현지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난징의 거의 모든 경찰 인력은 이 사건에 매달렸다. 범인은 피해자 시신 대부분을 번화가 5, 6곳에 나눠 유기했다. 경찰은 시신 유기 장소 조사를 바탕으로 범인이 ①난징대 캠퍼스 근처에 살고 있고 ②자전거를 이용해 시신 유기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범인은 이동하면서 무거운 짐을 옮겨야 했다'고 본 것이다. 이를 근거로 경찰은 시신 유기 현장에 있었거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일일이 조사했다. 다만 지금처럼 폐쇄회로(CC)TV 설치가 전면화하지는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모두 '가설'에 근거한 수사였다.

하지만 범인은 마치 농락하는 듯, 경찰보다 늘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아이칭의 신체를 잘게 절단하는 것도 모자라 일부는 삶기까지 하는 등 마구 훼손했으면서도, 머리와 손가락 3개만은 온전한 형태로 버렸다. 결국에는 아이칭의 신원 확인이 가능하도록 의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전자(DNA)를 활용한 법의학 기술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1990년대에, 아이칭의 입가 오른쪽 위의 유채씨만 한 점은 희생자 특정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자 경찰은 수사 방향을 전환했다. '범행 수법'을 토대로 살인범 신원을 밝히려 한 것이다. 토막 살인 방식에 비춰 범인은 상당히 전문적, 특히 해부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추정됐다. 아이칭의 시신을 본 경찰관은 "손과 발이 매우 정교하게 절단돼 있었다"고 말했다. 칼날이 뼈처럼 단단한 부분을 완벽하게 피해 갔다는 점에서 수사관들은 △정육점 주인 △의사 △법의학자 등의 범행일 수 있다고 판단, 인근의 관련 종사자들 전원을 조사했다. 그러나 이 역시 가설에 불과했고, 가시적 성과도 없었다.

사건 20년 후, 공소시효 끝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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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중국 난징에서 토막 살인을 당한 희생자 댜오아이칭의 사진을 가족이 들고 있다. 바이두 캡처


끝끝내 경찰은 수사 범위를 조금도 좁히지 못했다. 과학수사 기법이 부족했고, 온갖 가설에 허우적대느라 경찰의 초동 수사는 혼선을 빚었다. 정확한 범행 현장조차 찾지 못했으니, 유력 용의자 특정도 요원한 일이었다. 난징대에 설치된 특별수사팀은 3개월 후 별 소득 없이 철수했다. 아이칭의 죽음은 그렇게 미궁에 빠졌고, 세월이 흘렀다.

워낙 충격적이고 잔혹한 범죄였던 탓에, 아이칭 피살 사건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영구미제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중화권 작가 여러 명이 사건을 각색해 소설을 냈고, 누리꾼들은 온라인 게시판에 범죄 관련 증거와 가설을 모아 나름의 추리를 이어가고 있다. '종교 의식' 연루설, 당시 아시아 최초로 소장 이식을 성공한 난징 종합병원의 '의료 실험설' 등 온갖 음모론이 아직도 쏟아진다. 상상력을 가미한 누리꾼들의 과도한 재해석이 반복되면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해진 채 '도시 괴담'처럼 구전되고 있기도 하다.

'20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난징대 토막 살인 사건, 오늘부터 정식 미제 사건으로 전환.' 2016년 1월 19일,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웨이신(위챗)에서는 이러한 제목의 기사가 널리 퍼졌다. 아이칭이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딱 20년이 흐른 이날이 공소시효 만료일이며, 따라서 앞으로는 범인을 잡아도 형사 책임을 묻기 힘들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인 1월 20일, 중국 공안부 형사국은 공식 웨이보 계정을 통해 이를 "유언비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이미 공안 기관에서 수사 중이며, 경찰은 법에 따라 (범인을)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유명 형법 전문가인 홍다오더 중국정법대 교수는 당시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만약 누군가가 살해됐지만 △당시 아무도 발견하지 않았고 △신고하지 않았으며 △공안 기관이 사건을 수사하지 않았다면, 20년 후에는 '공소시효가 지나 버린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난징대 시신 훼손 살인 사건'의 경우, 발생 단계 때 공안 기관에서 이미 수사를 시작했고, 용의자가 수사망을 피한 것이기 때문에 공소시효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따라서 잡히게 되면 여전히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중국 수사기관은 그렇게 '영구미제 아닌 영구미제'가 된 사건을 여전히 쫓고 있다.

25년간 '대학의 답변' 기다리는 아이칭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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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중국 난징에서 살해된 댜오아이칭의 언니 아이화가 2021년 4월 6일 고소 취하를 알리며 쓴 글. 웨이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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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댜오아이칭'이라는 이름은 또다시 언론 보도를 장식했다. 아이칭의 언니 아이화가 동생의 피살 사건과 관련해 난징대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다. 아이칭의 유족은 캠퍼스 안전보장 책임을 물으며 162만 위안(약 3억 원)을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가족은 실종 당일 기숙사 사감이 처벌 권한을 남용, 룸메이트의 개인적 잘못에 불과했는데도 아이칭을 '연좌제' 방식으로 처벌한 것을 지적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아이칭이 기분 전환을 위해 기숙사를 나갈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시신 발견 때까지 아흐레 동안 아이칭이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학교 측이 이를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 점도 문제 삼았다. 시신 발견 장소가 모두 캠퍼스 인근이었던 만큼, 캠퍼스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도 묻고 나섰다.

다만 일주일 뒤, 아이화는 돌연 웨이보에 글을 올려 '소송 취하'를 알렸다. 우선 그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답변을 받고 싶고, 답을 줄 수 있는 곳은 법원과 난징대뿐"이라며 "25년이나 기다린 우리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소송 제기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의 대화 끝에 '여러 요소'를 고려해 소송 철회를 결정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희는 아직 살아야 하고,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력감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누리꾼 여러분이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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