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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횡설수설/신광영]마약수사 용산 외압설 부른 낯선 경무관의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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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지난해 가을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마약 수사로 큰 성과를 냈다. 필로폰을 국내로 몰래 들여온 말레이시아 조직원들을 검거해 74kg을 압수했다. 830억 원어치에 달하는, 단일 사건으로는 역대급 규모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밀수범들부터 “세관 직원들 도움으로 마약을 통과시켰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밀수를 단속해야 할 세관이 오히려 공범일 수 있다는 중요한 범죄 단서였다. 사건을 보고받은 경찰청장은 “대내외에 잘 알려야 할 훌륭한 성과”라고 치하했다.

▷그런데 언론 브리핑을 앞두고 수사팀은 난관에 부딪혔다. ‘세관 연루 의혹도 공개하겠다’는 수사팀장(백해룡 경정)과 ‘그건 빼라’는 서장(김찬수 총경)이 갈등을 빚었다. 백 경정은 최근 국회에 나와 당시 상황을 폭로했다. “서장이 ‘용산에서 심각하게 보고 있다’면서 브리핑 연기를 지시했다. 용산에서 괘씸하게 보고 있다는 취지여서 머리가 하얘졌다.” 이에 김 총경은 “직을 걸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해당 대화 녹취가 없어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석연찮은 대목이 적지않다. 김 총경의 지시로 브리핑이 연기된 사이 백 경정은 고위 간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시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이던 조병노 경무관이었다. 그는 “브리핑에 세관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 경찰이나 관세청 둘 다 정부 일원인데 스스로 침 뱉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경찰청장이 널리 홍보하라고 칭찬한 사건에 지휘계통에도 없는 간부가 끼어들어 중요 내용을 빼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 경무관은 용산과 가깝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채 상병 사건 핵심 인물인 임성근 전 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의 핵심이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공범인 이종호 씨가 그를 위해 용산에 승진 로비를 한 정황도 있다.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과시해온 이 씨는 지인과의 통화에서 조 경무관을 언급하며 “별 2개(치안감) 달아줄 것 같다”고 했다. 조 경무관이 실제 승진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청장이 그의 부당한 수사 개입을 문제 삼아 인사혁신처에 징계를 요청했음에도 ‘불문(책임을 묻지 않음)’ 처리됐다. 청장의 징계 요청이 수용되지 않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세관이 마약 밀수범들과 공모한 단서가 나왔다면 공권력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이므로 적극 수사해 성과를 내려는 게 경찰 조직의 생리다. 그런데도 조 경무관이 일면식도 없는 수사팀장에게 대뜸 전화를 걸어 ‘세관은 빼달라’고 한 것은 경찰청보다 센 곳에서 내려온 요구 때문은 아니었는지 의심을 살 만하다. 게다가 마약 수사로 큰 공을 세운 백 경정은 지구대로 좌천된 반면, ‘용산 발언’ 의혹이 있는 김 총경은 대통령실 행정관으로 영전한 것도 정상적인 인사로 보이지 않는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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