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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볕 뜨거운 날’을 ‘볕 즐거운 날’로 누리는 법[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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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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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아, 너무 덥다’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돌아다니다 보면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했다. 여름이 점점 못 버틸 정도로 가혹해지는 것 같다. 여름에는 그저 에어컨을 켜 놓고 방바닥에 누워 책이나 읽는 것을 최고라 여기지만 날이 너무 더워 그것마저 힘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충북 제천에 있는 친구 치형, 경신 씨에게 SOS를 치고 휴가 일정을 잡았다. 더위에 지쳐 파김치가 될 때마다 새벽 운전을 해 제천으로 갈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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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제천은 과연 좋았다. 나는 이곳에만 가면 왜 이렇게 심신이 녹고, 풀어지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늘 마음이 급한데 이곳에서는 절로 슬로 모드가 된다. 잠도 잘 잔다. 왜 그런 걸까? 가만 생각해 보니 그곳 특유의 느긋함 덕분이었다. 이 부부는 내일은 물론이고 당일 일정도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 내일은 김밥을 만다, 같은 큰 계획만 있을 뿐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먹는다는 다짐은 없다. 일어나는 대로 걸어서 5분 거리인 마트로 가 장을 보고 되는 대로 맛있게 먹으면 충분.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휴대전화도 자주 안 들여다본다. 하루는 “김밥을 먹은 다음,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자” 느슨한 약속을 했는데 아내가 “배가 부르니 졸린다”고 하자 “그럼 다 같이 한숨 자고 나가자” 하고 금세 의견이 모아졌다. 때마침 이부자리도 그대로였다. 그런 생활을 보는 기분은 늘 신선하다. 애면글면 시간에 성실해지지 않으니 비로소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곳에서 보낸 2박 3일이 내내 그렇게 흘러갔다.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한껏 늘어진 시간을 보내고, 출출해지면 닭갈비와 쌈밥을 먹으러 갔다. 외식하러 나가던 길에도 날씨는 불처럼 뜨거웠다. “와, 진짜 덥다. 언제나 시원해지려나?” 불평하자 경신 씨가 웃으며 말했다. “여름은 원래 이런 거 아닌가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세요.” 땡볕에 담대하기는 치형 씨도 마찬가지였다. 별명이 곰일 정도로 든든하고 묵직한 그는 덥다 싶으면 마당에 설치한 야외 풀장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그러면서 한마디.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니 좀 낫네.”

하이라이트는 계곡 물놀이였다. 너럭바위와 수풀이 평화로운 곳에서 우리는 물장구를 치고, 헤엄을 치고, 잠수 놀이를 했다. 볕과 물속에서 놀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 허공에 대고 “여름아, 가지 마” “나, 여름 좋아” 하고 오버를 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바위에 몸을 밀착하자 온몸에 열기가 퍼져 나갔다. 볕을 받아 일렁이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한옥에 사는 어르신들은 “볕 놀리지 마라. 볕 좋은 날에는 빨래라도 널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볕을 놀리지 않는 건 일상에서도 지킬 만한 약속 같았다. 볕이 좋은 날에는 응당 물놀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계절의 바깥에서 불평만 하지 않고 그 속으로 풍덩 들어가니 생명력 뻗치는 이 계절이 또 나쁘지 않았다. 그런 기분으로 하루하루 길게 놀았다. 사위가 캄캄해질 때까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설거지한 다음에는 다 같이 둘러앉아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였다. 다음 날엔 또 늦잠을 자고.

경신과 치형 씨는 그렇게 사계절을 차별 없이 즐긴다. 가을에는 정방사에 갈 생각을 하면 좋고 겨울에는 눈썰매를 탈 수 있어 좋단다. 봄은 이유를 댈 것도 없이 좋고. 그렇게 모든 계절을 품에 안으면 새록새록 좋은 시공간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일의 태도, 삶의 태도만큼이나 계절을 대하는 태도도 중요하지 싶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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