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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기자수첩] 서학 개미 눈물 흘리게 한 초유의 사태에도 증권사는 ‘나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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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이었나요? ‘블랙 먼데이’처럼 장이 요동치는 상황에는 실시간으로 대응하는 게 중요한데, 손가락만 빨고 있었습니다. 대형 증권사도 마땅한 피해 보상 방안이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믿고 거래하겠습니까.”

최근 만난 한 30대 서학개미(해외주식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자)의 말이다. 그는 글로벌 증시가 폭락한 지난 5일 미국 주식 주간거래 서비스를 이용해 매매 주문을 넣었지만, 이내 취소가 됐다. 게다가 주문 취소 후 계좌 원상복구까지 늦어지면서 변동성이 컸던 밤시간 정규장에서조차 제때 매매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난 5일 멈춰 선 미국 주식 주간거래는 2주를 넘긴 지금까지도 먹통 상태다. 미국 정규장은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10시 30분에서 다음 날 오전 5시까지다. 국내 투자자가 이 시간에 주식 거래를 하기 힘드니 우리 시간으로 낮에 접수되는 주문을 취합해 미국 주식 거래를 할 수 있게 한 게 미국 주식 주간거래 서비스다.

2022년 초만 해도 국내 투자자는 미국 주식 정규시장(한국 기준 오후 10시 30분~오전 5시)과 프리마켓(오후 5시~오후 10시 30분), 애프터마켓(오전 5시~오전 7시 30분)이 열릴 때만 미국 주식 거래가 가능했다. 그러던 중 삼성증권을 시작으로 국내 증권사들이 앞다퉈 미국 대체거래소(ATS) 블루오션과 협업을 맺고 한국 낮 시간에도 거래가 가능하게 하면서 투자자들은 24시간 미국 주식 거래를 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주식 주간거래는 특히 60대 이상 투자자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정보 부재 등을 이유로 망설이던 고객들이 낮 시간 담당 프라이빗뱅커(PB)와 실시간 상담을 통해 미국 주식을 살 수 있게 돼서다. 국내외 이슈 발생 시 현지 투자자보다 한발 앞설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주간거래 서비스를 가장 먼저 시작한 삼성증권의 경우, 지난달 한달 발생한 전체 해외주식 거래액 20조5000억원 중 주간거래 거래액이 약 15%(3조1000억원)를 차지했다. 삼성증권의 주간거래 월평균 거래대금은 2022년 3000억원에서 지난해 6000억원으로 두 배 늘었고, 올해 들어서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편리한 줄만 알았던 이 서비스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모든 증권사가 계약을 맺은 곳이 블루오션 한 곳뿐이라, 여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거래가 정상적으로 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간의 오류는 일시적이거나 변동성이 큰 일부 종목에 그쳤으나, 이번에는 모든 주식거래를 무효로 돌려버리면서 투자자들은 뒤늦게나마 편리함 뒤에 숨겨진 위험성을 깨달았다.

이번 사태로 국내 19개 증권사 계좌 약 9만개에서 6300억원의 거래 금액이 취소됐지만, 마땅한 보상도 대책도 없다. 증권사는 중개 역할을 했을 뿐이고, 블루오션의 경우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민원 대다수도 직접적인 손해가 아닌 간접 손해라 민법상 배상 기본 원칙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미국 금융산업규제국(FINRA)으로부터 주간거래 서비스를 승인받은 현지 ATS는 블루오션뿐이라 다른 ATS와 계약을 새로 할 수도 없다.

투자자들이 더 답답한 지점은 그럼에도 상황을 해결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할 증권사가 마치 제삼자인 것처럼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증권사는 서학개미 덕분에 외화증권 브로커리지(위탁매매) 수수료 수익이 늘며 올해 상반기 순이익이 1년 전보다 두 자릿수 성장했다. 투자자들은 증권사들이 시스템을 고도화하기보다는 더 많은 고객을 끌어오기 위한 마케팅에만 열을 올렸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물론 증권사도 억울한 점은 있다. 배달로 음식을 주문했는데 갑자기 식당에서 음식을 못 주겠다고 하니, 식당이 아닌 배달 기사한테 음식값을 물어내라고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주간거래를 재개하지 않는 것도 시스템에 대한 안정성이 확인되기 전까지 투자자 보호를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의 긍정적인 요소를 굳이 찾자면, 많은 투자자가 블루오션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주간거래의 불안정성과 위험성을 인식하게 됐다는 점이다. 일부 서학개미는 다음 계약 갱신 시 국내 증권사가 힘을 합쳐 손해배상 조항을 명확하게 넣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증권사 또한 이번 사태의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내 주식 주문이 언제든 강제 취소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증권업의 가장 밑바탕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다.

정민하 기자(mi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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