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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 (목)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김대중 대통령의 눈물·숨결이 깃든 집…개인 아닌 국민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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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 격랑에 휩싸인 DJ 동교동 사저



중앙일보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 178-1. 金大中(김대중) 李姬鎬(이희호) 문패가 나란히 걸린 이 집은 격동의 현대 정치사의 상징이다. 1973년 DJ가 도쿄에서 납치됐다 구사일생으로 생환, 기자회견을 했던 곳이고, 가택연금 속에서도 민주화 투쟁을 이어갔던 저항의 현장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이끌던 ‘상도동계’와 함께 DJ의 ‘동교동계’는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의 산실이었다.

DJ와 동교동계의 정치 역정과 숨결이 깃들어 있는 동교동 사저가 격랑에 휩싸였다. 3남 김홍걸씨(21대 국회의원)가 최근 F 커피 프랜차이즈 업자에게 주택을 매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가족과 지지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유산(자택+노벨평화상 상금)을 기념사업에 쓰라는 이희호 여사의 유지를 거스른 것은 물론 김대중기념사업회(약칭 김대중 재단)·김대중평화센터(약칭 평화센터)와의 약속과 합의도 일방적으로 묵살한 데 대한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분란의 발화점은 어디며, 사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3남 단독 상속, 커피업자에 매각

재단에 소유권 넘긴다 했다 번복

사저 보존·관리 잘 될지 우려 높아

“근현대 문화유산 등록, 보존하자”

“사저 기증은 대통령 뜻이자 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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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 때까지 37년간 이용했던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 김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씨가 지난달 커피 프랜차이즈 업자에게 이 집을 매각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김대중·이희호 기념관으로 사용하라는 이 여사의 유언을 저버렸다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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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선 패배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 DJ는 영국 케임브리지로 떠나기 전, 당시 김성재 한신대 교수(현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에게 전 재산의 사회 환원 업무를 일임한다. 당시 DJ는 동교동 자택 외에도 서울 영등포, 경기 화성, 제주도에 지지자들이 기증한 약간의 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성재 이사는 노르웨이 오슬로 평화연구소(PRIO)를 벤치마킹해 아태평화재단과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설립을 제안했고, 이는 DJ 정계 복귀와 대선 승리의 발판이 된다. DJ는 1998년 집권 후 영등포 등지의 땅을 처분한 돈으로 사저 옆에 5층짜리 아태재단 건물을 신축했고 퇴임과 동시에 연세대에 기증, 현재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 이사는 “DJ는 공인으로서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교동 사저는 거주 공간으로 쓰다 사후에 기증하기로 했다”며 “이 여사가 사저를 DJ 기념관으로 쓰도록 유언하면서 이건 대통령의 뜻이기도 하고, 내 뜻이기도 하다고 말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2017년 2월 유언장이 작성됐다. 이 여사,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부인 윤혜라 여사, 차남 김홍업 김대중재단 부이사장, 3남 김홍걸 전 의원이 모두 동의했고 서명 날인했다. ▶노벨상 상금 8억원은 전액 김대중기념사업회에 기부하고 ▶자택은 김대중·이희호 기념관으로 사용하며 ▶만약 지자체 및 후원자가 매입해 기념관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보상금 중 1/3은 김대중기념사업회에 기부하고 2/3는 김홍일·김홍업·김홍걸에게 균등 상속토록 한다는 내용이다. 김성재 이사와 평화센터 고문이던 최재천 변호사도 집행인·증인 자격으로 확인 서명했다.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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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걸씨 반대로 서울시 인수 무산

사단은 2019년 6월 이 여사가 별세하면서 벌어졌다. 김홍걸씨가 돌연 사저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유언장 공증 절차가 누락됐고 ▶민법상 부친이 사망할 경우 전처의 출생자와 계모 사이의 친족 관계는 소멸한다는 규정에 의거, 이 여사의 유일한 친자인 자신만이 상속인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그해 8월 홍걸씨는 동교동 사저를 자신 명의로 이전하고 하나은행에 예치된 예금 8억원도 인출해갔다. 가족·재단·평화센터,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으로 처리한 것이다. 분쟁의 불씨가 이때 피어났다. 홍걸씨가 단독 상속받지 않았다면, 사저는 서울시로 넘어가 지금쯤 기념관으로 개관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 여사가 생전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만나 “서울시가 사저를 인수했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밝혔고 박 시장이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동석했던 김성재 이사는 “서울시와 인수를 위한 실무 협의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홍걸씨가 사저가 자신의 소유라며 서울시에 협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면서 기념관 협상이 무산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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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서울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고 이희호 여사 사회장 추모식에서 김홍걸 당시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왼쪽)과 김홍업 전 의원이 묵념을 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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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김홍업 부이사장이 가처분 신청을 냈고 서울지법은 “유언장이 법적 효력은 없지만, 민법상 사인 증여(死因贈與) 계약의 의사 표시로 봐야 한다”며 받아들였다. 사태가 유산을 둘러싼 형제간 다툼으로 비치고, 홍걸 씨 역시 상속세 체납에 대한 국세청 독촉 등으로 경매 위기에 처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되자 김대중재단(이사장 권노갑)이 전면에 나섰다.

“큰돈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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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가택 연금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담장 너머로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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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김대중재단의 배기선 사무총장이 홍걸씨를 수차례 만나 사저 보존과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설득했고 ▶홍걸씨가 기념관 건립을 위해 동교동 사저에 관한 모든 권한(소유권)을 김대중재단에 넘기고 ▶홍걸씨의 상속세·부채를 재단이 해결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홍걸씨가 보내온 매매계약서를 토대로 회계전문가 등의 자문을 거쳐 매매계약서와 부대계약서 초안도 작성했다. ▶상속세(17억원)·체납 부채 등을 계산해 22억원에 사저를 매입하는 것으로 하고 ▶기념관 건립 부대비용과 운영기금으로 20억원을 책정했다. 매매 대금 지급 시기와 방법 등이 명시된 문건은 현재 김대중재단에 보관돼 있다. 합의가 이뤄졌다고 생각한 김홍업 부이사장은 법원에 냈던 가처분 신청도 취하했다.

그러자 2023년 들어 홍걸씨의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월 김대중재단 문희상 상임 부이사장이 계약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홍걸씨가 계약금으로 요구한 현금 3억4000만원을 가지고 홍걸씨를 만났다. 하지만 홍걸씨는 “큰돈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대통령 사저를 컬렉팅하는 사람이 더 나은 조건으로 매입하겠다고 한다”며 재단과의 계약 체결을 미뤘고, 결국 지난달 2일 커피 사업자에게 사저가 매각됐다. 재단 관계자가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확인해봤더니 이미 매각된 뒤였다고 할 정도로 주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배기선 총장은 “올 5~6월경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홍걸씨에게 물었더니 2~3명이 의사 표시를 한 건 있는데 결정된 건 없다.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선 소식이 없었다”며 “이미 소유권이 다 넘어간 상태여서 매입자가 돈벌이 목적으로 사저를 이용하더라도 관여할 수 없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동교동계 주변에선 매매대금 100억원 중 96억원의 근저당이 설정된 점을 들어 거액을 대출받아 사저를 사들인 매입자가 과연 사저의 보존·관리, 기념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다. 배 총장은 “동교동 사저는 김대중 대통령·이희호 여사의 피와 땀과 눈물·숨결이 깃든 집인데 어떻게 민간 사업자에게 매각할 수 있나”며 “사저는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민주화의 상징이고 고향 아닌가”라고 울분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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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걸 전 의원이 지난 1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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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조건으로 매각한 건 아니다”

홍걸씨는 민간 사업자에게 매각한 게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어머니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기념관을 만들기 바라셨다”며 “사저는 원형을 보존해 10~11월쯤 김대중·이희호 기념관으로 일반에 무료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18일, DJ 서거 15주기 추도식이 열린 국립 서울현충원 DJ 묘역에서 홍걸씨를 만났다.

Q : 기념사업을 하는 조건으로 사저를 매각한 것인가.

A : “기념관이 매각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입한 분이 대통령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민간 기념관으로 활용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Q : 기념관 하라는 게 유언 아닌가.

A : “여러분들이 나서서 시립·공공 다 추진했지만 결국 안 되지 않았나. 24억원이 근저당 설정돼 있는데, 서울시(오세훈 시장)는 먼저 근저당 설정을 풀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한다. 일산(고양시 정발산동 김대중 사저 기념관)을 보라. 고양시장이 (국민의힘으로) 바뀌니 중단되지 않나. 공공 기념관 설립에 매달리기보다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마지막 수단으로 민간으로 간 것이다.”

Q : 근저당 설정액이 왜 그리 많은가.

A : “상속세 17억원에 각종 세금을 내지 못하니 국세청이 그 금액만큼 근저당을 설정했다.”

과중한 세금과 체납에 대한 압박 때문에 민간업자에게 매각했다는 해명이지만, 애당초 홍걸씨가 단독 상속하지 않고 서울시로 넘겼으면 상속세 문제도, 지금 같은 분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사저 되찾자’ 모금 운동 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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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故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사저 보존 촉구 집회를 하는 새로운미래 당원들의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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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은 “홍걸씨는 매각 과정에서 재단이나 홍업 씨등 가족과도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매입자가 사저 보존·관리를 취지에 맞게 잘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며 “매각을 되돌려 사저를 원형 보존하는 것이 우선적인 1차 해법”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동교동계 원로와 뜻있는 국내외 인사들과 힘을 모아 사저를 되찾기 위한 모금에 착수할 계획이다.

정부 여당의 움직임도 변수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5선,인천 동구미추홀구을)이 “동교동 사저와 김대중 정신은 민주당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야가 함께 나서 역사적인 화해의 장소로 계승하여 국민 통합의 단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용산 대통령실도 여론 동향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침 9월 15일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의한 법’이 발효된다. 법의 취지를 살려 동교동 사저와 YS의 상도동 사저를 동시에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등록, 지자체가 보존·관리케 하자는 윤 의원 안이 실현될지 주목된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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