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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 (목)

[최순화의 마켓&마케팅] 절제 소비 ‘노바이’ 트렌드, 고물가 시대 일시적 현상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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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절제 소비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2년 전 물가 상승이 체감되기 시작하면서 특정 기간, 특정 영역에서 0원 지출에 도전하는 무(無)지출 챌린지가 등장했다. SNS에서는 지출을 최소화하는 노하우를 게시하고 서로 응원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젊은 층이 필수 항목으로 여기는 통신비도 절약 대상이 되어 최저 요금제나 알뜰폰으로 변경하는 경우가 많다. 2023년 4분기 20대, 30대의 통신비는 2019년 대비 각각 29.2%, 32.8% 감소했다.



세계는 요즘 낭비 최소화 열풍

SNS로 노하우 공유, 서로 응원

탈물질·반소비로 확장 가능성

레딧 노바이 챌린지에 5만 명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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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무 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시위. [사진 인디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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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에서도 생필품과 교통비, 최소한의 교제비 등을 제외한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노바이(No-Buy) 챌린지를 선포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젊은이가 많다.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노바이 챌린지에는 5만 명 이상이 참가했고, 틱톡에서도 주식 투자 등 돈 버는 정보와 함께 현금으로만 생활하기 같은 절약 관련 정보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새 옷은 1년에 다섯 벌 구매가 적정하다는 ‘5의 원칙(Rule of 5)’을 패션 전문지 보그 등 여러 매체가 보도하자 적은 아이템으로 다양한 패션을 연출하는 노하우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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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연합의 Buy Nothing Day 캠페인. [사진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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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소비의 역사는 1990년대 촉발된 반소비(anti-consumerism)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혹적인 마케팅이 과소비를 유발한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기업의 상업성 및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반사회 단체의 활동이 거세졌다. 비영리기관 애드버스터즈(Adbusters)는 연중 최대 할인이 시작되는 블랙 프라이데이를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로 지정해 대형 쇼핑몰 주변에서 반성을 촉구하는 집회를 벌였다. 탈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워런 버핏, 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회장 등 수퍼 리치의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이 화제를 낳으며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일본의 극단적인 절약 소비가 두드러졌다. 1980년대 이후 출생해 경제 침체와 대지진, 테러를 겪으며 성장한 젊은 층은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소비 행태를 보였다. 소비를 가치 없는 행동으로 여기거나 죄악시하는 혐(嫌)소비 현상까지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10대와 20대 소비자를 분석한 보고서에는 “화장품에 1000엔 이상 쓰거나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바보”라는 젊은이의 이야기와 “쇼핑과 외식, 여행을 모두 끊고 절약만 하는 젊은이들 때문에 당혹스럽다”는 경영자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는 ‘가성비’로 통하는,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의미의 ‘코스파(コスパ·cost performance)’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기업 동참해 재미 요소를 더하기도

지금의 노바이 현상은 과거 반소비·혐소비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모습이다. 반소비 운동을 환경오염과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는 사회단체가 주도했다면, 노바이 챌린지는 소비자 개인이 효율적인 지출 관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개별적인 행동이지만 소셜미디어를 바탕으로 강력한 소통력과 영향력을 발휘한다. 반소비 운동이 간헐적 이벤트였다면 지금의 절제 소비는 일상 속에서 지속적이고 빈번하게 이뤄진다. 또 마케팅과 소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반소비, 혐소비와 달리 무지출, 노바이 챌린지는 기업이 동참해 재미 요소를 더하기도 한다. 유통업체는 초저가 상품을 줄줄이 출시하고 금융업체는 챌린지를 완수한 고객에게 리워드를 지급하며 절약 생활을 지원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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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트의 자체 브랜드 베터굿즈(bettergoods). 요리의 즐거움을 강조하며 감각적인 디자인을 적용했다. [사진 월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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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도시락과 미슐랭 레스토랑을 오가듯 강도 높은 절약을 실천하면서 한편으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소비시장은 검소와 사치가 혼재된 모습이다. 고가부터 저가까지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단지 젊은 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팬데믹을 계기로 온라인 쇼핑에 능숙해진 장노년층도 초저가 차이나 커머스를 자유롭게 이용하며 실속을 챙긴다. 2024년 상반기 테무 구매액의 절반 이상을 50대 이상이 차지할 정도다. 나이가 많을수록 유명하고 익숙한 브랜드를 선호한다는 통념도 효력을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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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최소화를 추구하는 이케아의 요리책 『스크랩스 북(ScrapsBook)』. [사진 이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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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품 소비자는 저소득층이라는 공식도 의미가 축소됐다. 최근 월마트가 론칭한 자체 브랜드 베터굿즈(bettergoods)는 대부분 제품이 5달러 이하 가격대이면서도 요리의 즐거움을 강조하며 감각적인 디자인을 적용해 고객의 20%가 고소득층일 정도로 전 계층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를 계기로 월마트는 저가 할인업체에서 다양한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국민 브랜드로 거듭나고자 한다. 저렴한 가격을 넘어 간소하지만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케아는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을 제안하고 사과 씨 부분, 당근 끄트머리 등을 활용한 요리책(ScrapsBook)을 출간해 낭비를 최소화하는 브랜드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이름값, 명분이 중요해진 고가 시장

고가 시장에서는 이름값, 명분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이 중국인이 운영하는 하청업체에서 10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구매한 것이라는 보도는 전 세계적인 공분을 불렀다. 숙련된 장인이 엄선한 소재로 만든 제품이라는 특별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공들여 쌓은 명성도 물거품이 된다. 까다로운 구매 조건만 내세우고 사회공헌에 인색한 기업은 품위 없는 갑질 브랜드로 낙인찍힌다. 명품업체가 과소비를 부추겨 젊은 층의 형편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들린다.

올여름 기록적인 무더위를 겪으며 기후 위기의 심각성과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사람이 많다. 절제 소비는 개인의 지출 관리를 넘어 탈물질주의를 지향하는 반소비 가치와 맞물려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소비자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친환경 소비는 불필요한 소비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무지출, 노바이 트렌드를 고물가 시대의 일시적 현상이 아닌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지속 가능 소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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