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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슈가 탈퇴’ 언급에 해킹까지… HOT·젝키 패싸움하던 극성 팬덤, 왜 이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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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멤버 슈가. /빅히트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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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하는 정민재씨는 최근 BTS 슈가의 음주운전 논란을 두고 “그가 그룹을 탈퇴할진 모르겠으나, 탈퇴하지 않을 경우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고, 국내 활동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일부 팬덤의 집단 공격에 시달렸다.

정 평론가는 19일 조선닷컴과의 통화에서 “X(옛 트위터) 해킹 시도는 물론 이메일을 도용해서 다른 사이트에 가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했다.

정 평론가에 따르면, 슈가 탈퇴를 언급한 인터뷰가 나간 이후 외국인 팬들로부터 악성 국제전화가 오고 X 비밀번호를 변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팬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개인에 대한 공격을 넘어 아내의 소셜미디어 계정까지 찾아내 ‘슈가에게 사과하라’ 등의 댓글을 남겼다고 한다.

팬들은 정 평론가가 15일 집단 공격 피해 사실을 밝히자 여기에도 악성 댓글을 남겼다. “네가 해야할 건 거짓말과 명예훼손에 대해 사과하는 것” “당신은 슈가를 공격한 대가로 돈을 받았다” “당신은 슈가의 명예를 훼손해 놓고 왜 잘못한 게 없는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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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정민재씨가 극성 팬덤으로부터 받은 피해를 공개했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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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팬덤의 맹목적인 옹호가 사이버 불링(괴롭힘)과 같이 외부를 향한 집단적 공격 행동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비슷한 사례는 더 있다. 음주 뺑소니 혐의로 구속기소 된 트로트 가수 김호중의 일부 극성팬은 최근 ‘김호중 방지법’으로 불리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사무실에 전화·문자 폭탄을 날렸다. 이 같은 행동은 업무를 마비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김호중의 학교폭력 의혹을 제기한 유튜버에게 살해 협박을 하고, 김호중에 대해 ‘한시적 방송 출연 정지’를 결정한 KBS 측에 항의 청원을 올린 일도 있다.

일부 뉴진스 팬들이 민희진 어도어 대표를 비판하는 글에는 ‘좌표’를 찍어 악플을 남기는 일도 있었다. ‘뉴진스를 위해 민 대표와 분리해서 대응하자’는 글도 “뉴진스와 민희진은 하나”라고 여기는 팬들에게는 타깃이 됐다.

◇극성 팬덤 문화, 이전에도 있었지만…온라인에선 더 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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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 가요 시상식 직후 젝스키스와 HOT의 팬덤이 맞붙은 실제 사건을 묘사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한 장면. /tvN


공격적인 팬덤 문화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이돌 문화라는 게 처음 생긴 2000년 전후 팬덤 문화는 훨씬 심했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 팬들의 싸움은 오프라인에서 물리적으로 이뤄졌다. 1997년 12월 연말 가요 시상식을 앞두고 HOT와 젝스키스 팬들이 벌인 ‘전설의 패싸움’이 대표적 예다. 당시 HOT와 젝스키스 팬들은 서로 “우리 오빠들이 대상을 탄다”고 설전을 벌이다 대규모 몸싸움을 벌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소재로도 다뤄졌다.

현재는 스마트폰의 발달로 이런 현상이 온라인으로 옮겨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 평론가 사례처럼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집단린치 하는 방식이다. 정 평론가는 “스마트폰 사용으로 공격 대상에게 접근하기 쉬워졌고, 온라인상에서 뭉치기도 쉬워졌다”며 “이젠 사이버상에 주소가 있고 거처가 있어서 타겟팅과 집단 행동하기가 수월해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하 평론가는 “팬덤의 집단행동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사람들에게 질타받으면서 팬 사이에서 ‘조심하자’는 자정 작용이 있었는데, 최근 들어 공격성이 다시 심해진 느낌을 받았다”며 “문화가 발전해야 하는데, 되레 퇴행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우려했다.

◇'우리’가 아니면 적(敵)…확증편향과 군중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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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슈가가 지난 6일 서울 송파구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어거스트 디 투어 디 데이 더 파이널'(Agust D TOUR D-DAY THE FINAL) 공연에서 무대를 펼치고 있는 가운데, 팬들이 응원봉을 들고 응원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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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팬덤의 현상은 심리학적 측면에서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 군중심리로 풀이되기도 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확증편향이 일어나게 된다. 좋은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건 다 부정하는 것”이라며 “사람은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이 틀렸단 걸 인정하기 너무 힘들어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를 유지하려는 속성을 갖는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사생활이 생각하던 것과 다르더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곽 교수는 또 “결속력 때문에 무조건적인 지지 현상이 발생한다”며 “팬덤 내부에선 ‘우리’라는 군중심리가 더욱 강해진다”고 했다. 이번 정 평론가 사례를 두고 “팬덤 입장에선 정씨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봤다.

업계에서도 문제를 인지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없는 상황이다. 한 대형 소속사 관계자는 “팬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과도한 행동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많다”며 “하지만 팬덤은 어디까지나 자율 영역이기에 소속사가 나서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이어 “그저 팬덤이 행하는 일들이 아티스트 명성을 깎는 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곽 교수 역시 “한번 팬덤이 형성되면 반대 세력이 나타났을 때, ‘우리’라는 속성이 더욱 강해진다”며 “’우리’의 반대편에 더 반감이 생기고, 자기들끼리 더 지지하게 되고, 더 강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무조건적인 지지에서 빠져나오는 건 너무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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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지민의 생일을 맞아 인도네시아 팬이 맹그로브 묘목 1000그루를 심자는 제안을 해 9일 만에 1800여명 기부로 베노도 마을에 8375그루를 심는 장면.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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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앞선 사례들은 모두 ‘극성 팬덤’에 해당하는 내용들이다. 아티스트 팬덤의 이름으로 기부하거나 콘서트 때 쌀 화환을 기부하는 등 긍정적인 방식으로 결속력을 표출하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정 평론가가 외국인 팬들의 집단 공격에 시달릴 때도, 일부 팬은 “적당히 해라. 화낼 대상이 잘못됐다” “같은 팬으로서 부끄럽다” 등 자정 활동에 나섰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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