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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이슈 질병과 위생관리

윤정원, 나영 인터뷰① “재생산권, 낯설지만 전세계가 그 방향으로 가고있어”[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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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4년이 넘도록 정부와 국회는 임신중지 시스템을 어떻게 보건의료 시스템으로 들여놓을지 논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달 초 임신 36주째에 ‘낙태 수술’을 했다는 유튜브 영상이 논란이 되자 보건복지부는 며칠 만에 살인죄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죠. 이렇게 정부가 빨리 대처할 수 있는데 임신중지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왜 더뎠을까요.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그간 정부와 국회가 무엇을 해야했는지 ‘낙태죄 폐지 이후 상상력’을 보여주기 위해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의 ‘스웨덴 연수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연구위원인 윤 전문의는 지난해 12월부터 두 달간 스웨덴 연수를 다녀왔는데요. 스웨덴은 80년 전부터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했고 재생산 건강을 인권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입니다. 그는 임신중지가 필수 의료인 스웨덴의 제도, 클리닉 운영 사례 등을 플랫 사이트에 5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연재 취지에 대해 듣기 위해 윤 전문의와 나영 셰어 대표를 지난달 26일 인터뷰했습니다. 플랫 입주자님들을 위해 전문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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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전문의가 지난달 2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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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36주 영상’에 대해 복지부가 ‘살인죄’ 혐의로 수사 의뢰를 했다.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몇 년 동안 정부가 어떤 대응을 했는지 의문스러운데 이번 조치가 당황스럽다.

나영 = 우선 과거 ‘낙태죄’가 존재하던 때에도 ‘낙태죄’와 ‘살인죄’는 구분됐었다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법적으로 독립적인 인격권이 부여되는 시점은 출생 이후이기 때문이다. 출산 이전에 이루어진 일이거나 태아가 모체에서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면 그 시기가 언제든 임신중지에 살인죄를 적용할 수는 없다. 임신 후기에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상황은 ‘낙태죄’가 존재하던 때에도 있었고, 처벌 수준이 더 심한 다른 나라에도 있는 일이다. 오히려 처벌이 강한 나라에서 임신중지 시기가 더 늦어진다는 점, 위험한 임신중지나 영아 유기, 모성사망률과 영아사망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봐야 한다.

‘낙태 36주 영상 논란’에서 정부와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은 이 사건에 대한 살인죄 적용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시기가 불필요하게 너무 늦은 시기까지 지연되지 않도록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또 그를 위해 보편적·포괄적인 상담과 보건의료 지원·연계 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임신중지를 합법화하거나 비범죄화한 국가들은 이전 법의 폐지가 이뤄지는 시점부터 정부가 새로운 보건의료 지원 체계와 관련 정책,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최대한 이른 시기에 임신중지에 대한 고민과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까운 지역의 임신중지 가능한 병원을 안내하고 출산, 양육까지 총체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미 2021년부터 ‘낙태죄’ 처벌 조항의 법적 효력이 사라졌는데도 보건복지부는 아무런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혼자서 고민하고, 혼자서 병원을 알아보고, 비싼 병원비와 막막한 양육 조건 속에서 고민하다 초기에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복지부가 책임을 느껴야 하는데 오히려 재빠르게 나서서 살인죄 수사 의뢰부터 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윤정원 = 헌재 결정으로 형법에 있던 임신중지를 한 여성과 의사에 대한 처벌 조항이 사라졌다. 지금은 경찰의 수사 목표가 임신중지를 한 여성을 수사하는 것인지, 의료인을 수사하는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낙태죄로 수사할 수 없으니 살인죄로 수사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낙태죄가 폐지된 상황에서 다른 이름으로 계속 여성들을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고 정부가 범죄화 이데올로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진상파악을 하고 현장에서 어떤 부분이 비어 있는지 살펴봐야 이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데 정부가 오히려 범죄 이데올로기를 나서서 확산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나영 = 올해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의 한국 정부 심의에서도 보건복지부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발언했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형법 조항의 위헌성을 분명히 인정한 것임에도 마치 헌법불합치 결정은 위헌의 의미가 아닌 것처럼 발언한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복지부의 거짓말에 현장에서 바로 항의 표시를 했다. 2018년에 이미 한국 정부에 임신중지 처벌을 없앨 것을 권고하고, 이후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과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환영했던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들도 복지부의 왜곡된 답변과 현실 인식에 크게 실망감을 표현했다. 위원들은 비범죄화를 전제로 어떤 지원 시스템이 미비한지 한국 정부의 책임 이행에 대해 물었는데 한국 정부는 정면으로 역행하는 답변을 한 것이다. 복지부가 여전히 과거의 형법 체계에 머무르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게 근본적으로 문제다.

‘재생산권’으로 논의를 확장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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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가인구정책 변천사. 정부가 성과 재생산권리를 국가의 필요에 따라 통제해온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김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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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 구도가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윤정원 = 1973년 미국의 임신중지 합법화(로 대 웨이드 판결) 때 나왔던 논리로 오래된 구도다. 사실 그 이후에 재생산 권리, 재생산 정의 관점으로 계속 논리가 발전해왔다. 태아의 생명권은 기본권이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사회권으로 대립하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질 수밖에 없다. 40년 넘게 인권에 대한 논리를 발전시켜왔고 기본권에서 건강, 정의, 비차별 등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인권 개념이 발전해왔는데 우리는 협소한 인식틀에 갇혀 있고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안 주던 때와의 논리랑 뭔가 다른지 모르겠다.

재생산 권리라는 개념이 우리에겐 낯선 개념이다보니 익숙하진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전세계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단순히 피임할지 말지, 임신 상황에서 아이를 지울 거냐 말거냐가 아니라 여성의 삶, 인간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인간의 삶이 확장되지 못하고 저해하는 요인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관점에서 재생산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건강권 개념도 확장돼 왔다. 과거엔 질병이 없는 상태를 건강한 상태라고 봤다면 이제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모든 것에서 안녕한 상태를 건강한 상태라고 한다. 건강권이 기본권인 이유는 건강이 담보되어야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하고 싶은 걸 펼쳐나갈 수 있는 자원으로서 기본권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이는 정의와도 연결된다. 건강이 모든 이에게 담보되어야 출발선이 같아지기 때문이다.

재생산권도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조건 때문에 사회에서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의 균등과 평등, 건강할 권리의 관점에서 ‘베이스라인’을 맞춰주자는 것이다. 임신 여부든, 아이가 있는지 여부든, 어던 사랑을 사랑하든 차별받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커져 온 것이다. 다른 건강 이슈들과 다르게 임신중지의 케이스에서만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 임신중지는 여성만이 경험하는 사건인데, 다른 모든 의료와 다르게 임신중지만 열외로서 건강보험 적용도 안 되고 교육도 안되고 통계도 없다.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맺기 측면에서도 의사가 설명해주면 환자는 선택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관계 맺음도 어렵다. 그동안 범죄화됐단 역사 때문에 여성들은 무조건 의사가 하자는대로 하게 되고 현금을 싸들고 가야하고 남자친구나 부모의 동의서를 받아오라는 차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동안 여성의 건강을 갉아먹는 방향이었다면 이제 이를 재생산 건강의 관점으로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는 여성의 건강 뿐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건강, 모든 가족의 건강까지 연결된다. 사회가 모든 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한다.

나영 =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단순히 대립하는 논리로 보면 매우 협소한 관점에서 임신과 출산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관계에서부터 피임, 임신의 유지나 중지, 출산, 양육에 관한 모든 과정이 여성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교육·노동·주거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조건, 파트너나 가족 등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결정도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는 구호를 정말 많이 외쳤다. 처벌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임신중지와 양육에 대한 결정에 있어 국가가 삶 전반의 여건, 사회적 불평등을 얼마나 바꾸는지가 핵심이다. 그에 대한 결과가 출생 이후의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영향을 미치는 생명권의 실질적인 보장에 연결돼 있다.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이 <낙태죄 폐지, 다음을 상상하다-윤정원의 스웨덴 연수기> 연재를 시작하기로 한 것은 ‘새로운 상상력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나영 대표의 이야기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상상력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나영 = 지금까지는 임신중지가 몇몇 조건 외에는 불법이어서 공식 보건의료 체계 하에서 다룰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도 처벌을 피하기 위한 방법만 고민했기 때문에 현금으로 비싼 의료비를 요구한다든지, 강간이 아닌데도 강간이라고 서약서를 쓰게 하는 등의 나쁜 관행만 늘어났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되었다는 것은 그간의 이런 비공식적이고 건강권과 인권을 침해해 온 관행들을 없애고, 실질적인 연계 지원과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을 위한 조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정부나 의료기관들 대부분이 실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비범죄화 조건이 이뤄졌으니 정부는 공식 체계 구축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복지부가 건강보험 적용 확대를 통해 의료비 수가를 안정화하면 병원에서 과도한 의료비를 현금으로 요구해서 임신 당사자가 비용을 구하느라 폭력적인 상황에 처하거나 임신중지 시기가 불필요하게 지연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또 복지부는 어느 의료 기관에서 임신 몇 주까지, 어떤 방법으로 임신중지를 제공할 수 있고, 그 병원에서 안 되면 어느 병원으로 연계될 수 있는지 전수조사를 하고 연계 체계를 만들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호주 등 많은 국가에서 이런 방식으로 거주지나 직장에서 가까운 의료기관에 대한 공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공식 체계가 마련되면 매년 임신중지가 몇 건이 이뤄지고 있고, 몇 주차에 임신중지가 이뤄지고 있는지 공식 통계도 낼 수 있게 된다. 그 통계가 있어야 임신중지 시기가 불필요하게 지연된다거나, 연계 지원이 안 되는 상황들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고, 이후의 법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다.

[낙태죄 폐지, 다음을 상상하다]모든 아이들이 원하는 때, 환영받으며 태어나기 위해

상담의 틀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위기 임신 상담’이라는 개념으로만 상담 체계를 구축해 왔고, 7월 시행된 보호출산제 체계에서도 여전히 ‘위기임신’이라는 틀이 유지되고 있다. 누구든, 임신 중 어느 때라도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육에 대해 포괄적으로 상담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임신중지를 고려하는 상황은 임신 전후와 임신 기간 계속해서 변화하는 파트너와의 관계, 학업이나 직장 상황 등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성교육, 성관계, 피임, 임신의 유지와 중지, 출산, 양육이 다 따로 다뤄졌고, 그마저도 매우 협소하고 보수적으로 다뤄져왔다. 이제 한 사람의 생애주기 안에서 이 모든 과정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피임이든 임신중지든, 출산이든 안전하게 할 수 있을 때 삶의 다른 경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제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의 영역임을 분명히 하고, 공식 체계를 구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일 뿐, 지금은 그냥 ‘국제 표준’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오랫동안 임신중지가 불법, 비공식적 영역으로 다뤄진 결과 지금 한국 의료 현장에서는 88년 전부터 도입돼 세계보건기구의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되고 지금 99개국이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는 유산유도제도 아직 사용을 못한다. 임신중지를 임신, 출산과 마찬가지로 보건의료 체계의 기본 영역으로 다루게 되어야 의료인 양성도 가능해지고 의료의 질도 높아진다. 네덜란드 보건부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임신중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의 주변인이라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까지 제공하고 있다. 그런 조건을 계속 찾아가고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또 무엇을 더 좋은 환경으로 구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의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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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이 지난해 4월 9일 서울 용산구 용산역 광장에서 낙태죄 폐지 2주년을 맞아 국가에게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할 것을 유지한 집회를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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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들의 변화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크다.

윤정원 = 의료인들의 인식은 사회의 인식과 함께 간다. 의학적 전문 지식이 있어도 사회의 고정관념은 다르지 않고 의료 윤리가 재생산권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상황은 아니다. 학계와 의료계도 다르다. 학회는 대학병원 교수들 중심이고 의사회는 개원의 중심이다. 둘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대학병원 의사들은 임신중지 수술을 하지 않는다. 합병증, 태아 기형 등 위험한 상황에 대해서 다룬다. 전공의들 수련은 대학병원에서 하는데 수련 과정에서 이런 부분을 배우지 못한 채 개원의로 나오는 거다. 이후 선배들에게 알음알음 배운다. 학회 입장은 아직 안정성, 효과성을 입증하기 어려워서 약물로 인한 임신중지는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그동안 흡입술, 약물 등 안전한 방법 개발되어 왔는데 개원의들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고 오히려 대학병원에서는 소파술이라는 오래된 방식을 사용하는 면도 있다. 최신의 것은 학회에서 전파되어야 하는데 경색이 있다. 피임 가이드라인, 완경(폐경) 가이드라인은 외국에서 연구가 나오면 학회를 통해 퍼진다. 그러나 WHO 2022년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은 그렇지 않았다. 의료 기술 부분 뿐 아니라 정책과 정치적 부분까지 담겨 있는 가이드라인인데 시민단체인 셰어에서 번역 중이다.

제왕절개를 1년에 몇 건 하는지, 맹장수술을 몇 건 하는지 심평원에서 바로 데이터를 뽑을 수 있다. 임신중지는 건강보험 안에서 통제되지 않으니까 계기가 있지 않으면 현재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최신 약물을 도입한 후 건강보험을 적용해서 통계를 잡아야 한다. 건보가 적용되면 의사들은 배울 것이다. 정부가 학계를 설득해 의사 수련과정에 넣어달라고 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임신중지를 금지하면
아이의 건강도 담보할 수 없다


-최근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에 따르면, 미국 텍사스주에서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한 후 영아 사망률이 13%나 급증했다. 임신중지 제한과 영아 사망 연관성에 대한 최초의 실증 증거다. 이러한 우려를 계속 이야기해왔는데 숫자로 나왔다.

윤정원 = 임신중지 금지법이 통과되고 2년간 텍사스주에서 임신중지 받은 사람이 5명으로 나온다. 3만5000명이 다른 주로 이동해 임신중지를 받은 것이다. 주지사는 ‘우리 주는 임신중지 없어요’라면서 자랑스럽겠지만 여성의 입장에선 다른 주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가야 하고, 더 늦은 시기에 임신중지를 받게 되거나, 임신중지를 못 받게 되어 원치 않은 출산을 하게 되기도 한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피임은 100퍼센트가 될 수 없다. 원치 않은 임신이 ‘0’이 될 수 없는 거다. 원치 않은 임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 사람들이 어떤 경험했는지 듣는 등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른 주들은 영아사망률이 2%대로 증가했는데인데 텍사스주만 13%대로 급증했다. 선천성 이상으로 인한 영아 사망률은 25%다. 중대 기형의 경우도 임신중지를 금지하니 13%나 급증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임신중지를 금지하면 여성의 건강 뿐 아니라 아이의 건강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텍사스주의 전면 금지 이전에도 미국에는 ‘트랩’이라는 법이 생겼다.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의사의 자격을 강화시키는 법이다. 주별로 비교했더니 이 법이 있는 주에서는 ‘포스터 케어’에 입소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미국엔 ‘포스터 케어’라는 임시보호 후견제도가 있는데 우리로 보면 영아원, 보육원에 입소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이다.

‘턴어웨이 연구’도 있다. 20주를 기준으로 했을 때 1~2일 차이로 임신중지를 받거나 받지 못한 여성들을 대조군으로 삼아 추적 관찰한 연구다. 5년 뒤에 임신중지를 받을 수 있었던 여성들이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상황이 더 나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이렇듯 주별로, 나라별로 임신중지 관련 법들이 다르고, 한 나라에서도 법이 바뀌기 전후가 차이가 나는 것을 이용해 역학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 연구들 덕택에,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것이 여성의 건강에 유해하다, 대기 숙려 기간은 임신중지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늦은 시기에 임신중지를 하게 하므로 불필요하다는 근거가 쌓이고, 정책 가이드라인이 바뀌어왔다. 우리에게도 실태조사가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 윤정원, 나영 인터뷰(2)“한 세대만 바뀌면, 재생산권에 대한 고민도 바뀔것 ”

▼ 임아영 젠더데스크 겸 플랫팀장 layknt@khan.kr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모든 아이들이 원하는 때, 환영받으며 태어나기 위해

임아영 젠더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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