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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장보러 왕복 1시간 반… 서울에도 ‘식품 사막’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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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많은 지역에 집중

조선일보

지난달 25일 서울 관악구에서 주민 김모(88)씨가 쪽파 두 단 등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32도를 넘은 이날 김씨 집에서부터 장을 본 시장까지 걸어서 약 20분이 걸렸다. /최하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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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북한산 자락의 한 주택가. 이곳은 높은 지대에 있어 거주하는 일부 주민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 부른다. 고기나 과일, 채소 등 신선 식료품을 사려면 비탈길을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 본지 기자가 고령자가 거주하는 한 주택에서 출발해 가장 가까운 거리의 마트까지 걸어가 보니 경사가 심하고 계단이 많아 약 20분이 걸렸다. 덥고 습한 날씨 탓에 마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에 땀이 나 가방 끈까지 젖었다. 주민 이모(83)씨는 “장을 자주 못 봐서 평소에는 밥에 마른 반찬을 주로 먹는다”며 “요즘같이 더운 여름에는 이른 아침이나 해 진 뒤 장 보러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식료품점과 주거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발생하는 ‘식품 사막화’를 겪는 지역이 있는 것으로 31일 나타났다. 식품 사막이란 식료품을 파는 가게가 주변에 없는 지역을 뜻하는 학계 용어다. 지난해 구자용 상명대 공간환경학부 교수 연구팀은 서울시에서 주거지로부터 500m 이내에 식료품점이 한 곳도 없는 ‘식품 사막’이 시민 거주 지역 가운데 2.2%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연구팀은 “식품 사막 지역은 대부분 북한산과 관악산 등 자연 녹지 주변에 위치한 지역”이라며 “또한 은평구, 강서구, 구로구 등 서울시 외곽 지역에도 식품 사막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식품 사막’을 노인 인구 비율이 높고 평균 소득이 비교적 낮은 지역으로 보고 있다.

본지가 취재한 성북구 한 동네의 경우, 인구 통계로 60세 이상 비율이 30%를 넘기도 했다. 이곳에서 만난 노인들은 “마트까지 걸어가기 힘들어 장을 볼 때는 차라리 대중교통을 타고 멀리 떨어진 전통 시장에 간다”고 했다. 주민 김호기(74)씨는 식료품을 사기 위해 동대문구 경동시장에 자주 간다. 그의 집에서 경동시장까지 도보 15분, 버스 30분이 걸려 왕복 1시간 30분이다. 그는 “동네 외곽에 마트가 있지만 노인 걸음으로 비탈길을 가려면 거리가 멀어 힘들고, 물건이 다양하지 않다”며 “과일이나 채소를 챙겨 먹고 싶을 때는 큰 시장으로 나간다”고 했다.

관악산 인근 한 동네에 사는 김모(88)씨도 걸어서 약 20분 걸리는 관악구 현대시장에서 장을 본다. 본지가 만난 김씨는 한 손에 양산, 다른 손에 쪽파 두 단이 든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힘겹게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 긴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접어 올린 채 땀을 흘리기도 했다. 김씨는 “요즘 발목이 시큰거려 오래 걷는 게 힘들다”며 “시장보다 가까운 마트가 있긴 하지만 식료품 종류가 적고 비싸 20분 떨어진 시장에 다닌다”고 말했다.

대부분 노인들에게 온라인을 활용하는 새벽 배송 서비스는 그림의 떡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으로 주문하면 집 앞까지 식료품을 배달해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복잡한 사용법에 포기하기 일쑤다. 이날 성북구 한 대학의 기숙사 곳곳에는 온라인 새벽 배송 상자가 놓여 있었지만, 달동네 주택가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민 정영숙(75)씨는 “인터넷 배송은 젊은이들이나 하는 거지 우리 세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일부 마트에서 무료 배달을 해주기도 하지만, 매번 최소 주문 금액을 맞추긴 쉽지 않다고 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식품 사막 문제는 농촌이 심각하지만 서울도 예외는 아니다”라며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일본, 미국과 같은 ‘이동형 마트’가 절실하다”고 했다. 일본은 거주지 500m 안에 식료품 가게가 없는 노인을 ‘장보기 약자’로 지정하고, 이동형 마트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미국도 식품 사막 지역에 문을 여는 식료품 가게에 정부 보조금을 준다. 우리나라에도 경기 포천 등 지역 농협이 운영하는 이동형 마트가 일부 있지만, 도시의 일부 지역은 이런 시설이 없다는 지적이다.

[정해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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