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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9 (목)

(15) 도쿄 여행[한성우의 말과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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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문자·한자에 별별 외래어 버무려 쓰는 일본

그 소화력 놀랍지만…우린 한글 있어 안 부러워

경향신문

한자와 일본의 글자 가나가 많이 사용되는 일본어 표기. 뜻을 나타내는 핵심어는 대부분 한자로, 우리의 조사나 어미에 해당하는 부분만 히라가나로 쓰는 경우가 많다. 외래어나 강조할 때는 가타카나를 쓴다. 한성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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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国際空港에 도착해 酒店接送巴士를 타고 사흘 동안 머물 酒店으로 향한다. 그런데 딸아이는 Narita International Airport, Hotel Bus에 눈길이 먼저 가고, 아내는 여행 안내서의 정보에 의지한다. 꽤나 친절하게 돼있는 각종 안내 표지판을 보고 길을 찾는 중년 남성과 무조건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따라 움직이는 20대 대학생, 그리고 여행 안내서를 펼쳐 가야 할 곳과 가고 싶은 곳을 정하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다. 여행의 모든 일정을 같이할 세 일행이 서로 다른 정보에 의지해 같은 길을 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지만 셋은 동경, Tokyo, 도쿄에 가고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지극히 진부한 표현이지만 일본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말은 없다.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언어 면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불행한 역사 때문에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친한 척을 해서도 안 된다. 일본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은 일부러라도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가까워서 익숙한, 35년간의 불행한 기억이지만 그래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많은 이곳은 중국 다음으로 많이 찾게 되는 곳이다. 그때마다 보이는 말과 글의 풍경들은 늘 흥미롭다. 특히 두 종류의 일본 글자, 그리고 한·중·일 삼국이 공유하는 한자, 여기에 자기들 식으로 읽는 영어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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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안내 표지판의 다국어 표기. 일본어와 영어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가이드라인에 따라 한국어와 중국어 표기도 매우 충실하게 되어 있다. 한성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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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공 안내 표지의 반가운 한글

일본은 밉지만 일본인은 미워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의 정치와 외교는 뻔뻔스럽기 그지없지만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는 일본인은 상냥하고 친절하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도시의 모든 거리를 다녀봐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친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 있어야 할 곳에 반드시 있는 공공 안내 표지에 한글이 빠지지 않는다. 가나와 한자로 표기된 일본어 표기를 몰라도, 영어 안내를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모든 공공 교통 표지판에 영어, 한국어, 중국어 표기를 병기하는 것이 2018년에 가이드라인으로 제시되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 왜 한국어와 중국어 표기가 있는 것일까? 한국에 대한 배려와 존중 때문일까? 한·중·일 세 나라가 지리적으로 가깝긴 하지만 정치나 외교 면에서 썩 좋은 관계가 아닌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친절이 한국에 대한 배려와 존중 때문은 아닐 듯하다. 이러한 의문은 우리나라의 안내 표지나 안내방송을 보면 풀린다. 우리 또한 영어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중국어로 안내를 붙이고 방송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손님’ 혹은 ‘고객’에 대한 배려이다. 손님은 그저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니 장삿속이 깔려 있는 고객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찾는 이가 많으니, 그들에게 친절하게 안내해야 우리의 상품과 문화를 팔 수 있으니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친절 혹은 배려의 이면에는 늘 장삿속이 깔려있다. 공공 표지판에는 한글 표기가 친절하게 되어 있는데 기업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곳은 그렇지 않다. 본래 카메라를 파는 상점이었다가 온갖 물건을 다 파는 곳으로 변신한 상점에 가보면 영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점원이 반드시 있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점원은 없거나 드물다. 한국인과 한국어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의 수, 그리고 열리는 지갑의 두께가 결정하는 문제이다. 투자 대비 얻을 수 있는 수익에 철저하게 지배를 받는 영리 시설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어쨌든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고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더 일찍이 일본인을 위한 배려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그에 상응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서로가 대등한 관계에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이전 세대가 일본의 기술과 문화를 동경해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배웠듯이 일본의 젊은 세대가 한국의 문화에 심취해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주고받는 대등한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다.

한자의 생존과 부활

센소지(Sensoji)에 가려면 전철을 타고 아사쿠사(Asakusa) 역에서 내려야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센소지는 ‘浅草寺’이고 아사쿠사역은 ‘浅草驛’이다. 한자로는 ‘浅草’라고 써놓고 때로는 ‘센소’라고 읽고 때로는 ‘아사쿠사’라고 읽는 것이다. 일본어를 접해본 이들은 알고 있는 문제이지만 한자를 음으로도 읽고 뜻으로도 읽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한자를 음으로만 읽지만 일본에서는 뜻으로도 읽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자를 아는 한국인과 중국인은 한자투성이인 일본의 전문서적을 보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일본어로 소리 내어 읽지 못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더 궁금한 것이 있다. 일본의 고유문자가 있는데 왜 여전히 한자를 이토록 많이 쓰고 있는가? 우리는 한글과 한자가 전쟁을 벌이면서 ‘순한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일본은 왜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한자나 한자어를 쓰는 것은 사대주의에 물든 것인데 이들은 아직도 사대주의에 빠져 있는 것인가? 한자를 써놓고 음과 훈 모두로 읽으면 헷갈릴 수밖에 없는데 애초에 읽는 방법대로 일본의 고유문자인 가나로 표기해놓으면 되지 않는가?

문자는 쓰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쓰는 것 또한 누군가 읽기 위한 것이니 문자는 궁극적으로 읽기 위한 것이다. 한자는 배우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렵지만 일단 익히면 읽기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글자를 보고 뜻을 파악하기가 쉽다. 우리는 문자를 보고 소리로 바꾼 뒤 뜻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보자마자 뜻을 파악하니 이 면에서는 한자가 최고이다. 일본어를 일본의 문자인 가나로만 써놓으면 누구나 소리 내어 읽기는 편하다. 그러나 일본어의 특성상 그 길이는 길어질 수밖에 없고 뜻을 파악하기는 어려워진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본어 표기에서의 한자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한자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이들은 여전히 한자를 쓰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들어 우리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자를 알면 ‘금일 우천시 중식 미정’을 금요일에 우천시에서 미정이와 중국 음식을 먹는다고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언어나 문자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지 강요가 아니다. 한글로만 써도 읽고 뜻을 파악하기에 충분하니 한글만 쓰는 것이다. 한자를 쓰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한자를 쓰는 일본의 선택을 따를 필요는 없다. 한자어를 잘 모르는 세대에게 안내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어휘와 표현을 한글로 쓰면 된다.

엉터리 외래어에 대한 단상

도쿄에서는 ‘비루’에 가서 ‘비루’를 마신다. 우리는 ‘빌딩’이라 하지만 일본에서는 엉터리 발음인 ‘비루딩구(ビルディング)’도 모자라 ‘비루(ビル)’로 줄여 쓰고 말한다. ‘麦酒(맥주)’라 쓰고 ‘바쿠슈(ばくしゅ)’라고 읽으면 될 텐데 촌스럽게 ‘비루(ビ―ル)’라고 쓰고 말한다. 우리 같으면 엉터리 발음과 표기에 부끄러워하며 각각 ‘건물’과 ‘맥주’ 혹은 ‘보리술’로 바꾸자고 할 텐데 일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서양 말이 바다 건너와서 고생한다고 비아냥거릴 만도 한데 이들은 그런 자의식이 없는 것일까? 외래어를 너무 많이 쓰는데 그것마저 영 엉터리다.

한자나 외래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겪은 아픈 역사와 관련이 깊다. 대륙의 여러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사대를 강요받다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먼 바다와 가까운 바다를 건너온 이들에게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은 곧 겨레의 얼을 지키는 것이자 국가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의 말과 글이 아닌 한자와 한자어, 일본어, 서양어를 배격할 수밖에. 우리 말과 글이 있었기에 민족정신을 지켜왔고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 덕에 우리의 고유성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다르다. 일찍부터 문을 열고 네덜란드어에서 술 이름 ‘비루’를 받아들였고, 영어에서도 높은 건물을 뜻하는 ‘비루’를 받아들였다. 서양의 문물이 물밀 듯이 밀려올 무렵에는 한자를 이용해 수없이 많은 한자어를 만들어 동아시아 세 나라가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에도 자유롭게 외래어를 받아들여 길면 자르고, 필요하면 서로 붙여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민족정신이 말살되거나 사대사상이 고취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쓰기 좋도록 변형한다. 그렇게 해서 부족한 일본어를 채워나가고 있을 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넘었고 지구상의 모든 나라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눈과 귀로 세상의 모든 언어와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세계 순위에서 열 손가락을 조금 넘는 경제력과 한국어 사용자를 가지고 있으며 접두사 ‘K’가 붙는 온갖 문화상품을 전 세계로 내보내고 있다. 더는 과거의 경험에 위축될 필요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커왔고 앞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젊은이들이 커가고 있다. 이들에게는 한국어가 모국어이지만 영어가 세계어이고 각지의 언어가 활동어가 될 수 있다.

도쿄의 젊은이들 사이에 ‘교푸사루’가 인기다. ‘유케’와 ‘나무루’도 ‘힙한’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발음해보면 알 수 있듯이 ‘삼겹살, 육회, 나물’이다. 일본의 처지에서 보면 이러한 외래어는 이전의 것과 결이 다르지만 달리 보면 그저 외래어의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이런 외래어를 문제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젊은이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동과 짬뽕은 스파게티나 스테이크와 같은 외래어의 하나일 뿐이지 일본어에 뿌리가 있어 무조건 배척해야 할 말은 아니다.

일본은 언어와 문자의 속성과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자를 쓰고 엉터리 같은 외래어를 쓰지만 이는 그들의 언어 현실에 맞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를 감안하면 우리는 한자를 쓰지 않아도 돼 한자를 모르는 세대, 일본에 대한 나쁜 기억이 없으니 일본은 그저 외국 중 하나라는 생각을 가진 세대에게 문자, 말, 표현에 대해 강요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계란, 야채, 게양, 사양’ 등은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고 우길 이유도 없다. 그것이 여러 세대가 어울려 成田 공항에 도착해 셔틀버스를 타고 Tokyo를 같이 여행하는 방법이다.

■필자 한성우

경향신문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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