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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아무리 규범이 남북의 말을 갈라도…통하다 보면, 통일도 온다[한성우의 말과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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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북한말을 바라보는 시각

경향신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안북도 의주군 수해지역을 찾아 천막으로 만든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이재민들을 대상으로 지원 대책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을 지난 10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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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김정은 위원장의 공개 발화
전형적인 평안도 말과는 달라
오히려 남한의 말씨에 가까워

‘력사’와 ‘역사’ 오가는 발음도
주민들의 적개심 빠진 표현도
편견과 현실 사이 차이 보여줘

CD·USB 등에 담겨 문화 전파
남북 간 ‘ㅈ’ 발음 유사성 확대
이미 말과 글의 교류는 진행 중

주민, 어르신, 티브이, 병약자, 음료수, 폄훼……, 정치인의 대중 연설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법한 단어들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누가 이러한 단어들을 쓰느냐가 문제이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수해 현장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러한 말들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영상이나 음원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편에서는 심각하게, 다른 한편에서는 기쁨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건이다. 이 말들을 북한에서 쓰이는 일상적인 말로 바꾸자면 차례로 ‘인민, 로인, 텔레비전’이고 나머지 단어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김 위원장이 남한에서 쓰는 말을 따라 한 셈이니 남한말을 단속하는 북한에서는 심각하게 여길 사안이다. 그러나 통일 후 한국어의 미래를 생각하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남과 북의 말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지역이 다르니 본디 지역 방언의 차이가 있었고 분단된 지 80년이 되어가는 동안 교류가 없었으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남북 언어 이질화’는 수없이 거론되는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면 안 된다. 본래 다른 것, 그리고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같다. 남북의 주민이 만나서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가? 남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양쪽의 주민이 알아듣지 못했는가? ‘다름’이 아닌 ‘같음’에 초점을 맞추고 앞으로 더 같아질 것을 예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예측은 북한 지도층의 말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경향신문

2018년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경기 파주시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지역에 갔다 다시 남측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위 사진). 김정은 위원장이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찾은 ‘평화의집’ 방명록에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적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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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거당의 던깃불은 번떡이디 않는다

북한말, 더 정확하게는 평안도의 말을 흉내 낼 때 흔히 등장하는 것이 평양에서는 ‘정거장의 전깃불이 번쩍인다’이다. 이를 평안도 사람들은 ‘덩거당의 던깃불이 번떡인다’라고 발음한다는 것인데 이는 과장이 지나쳐 거짓에 가깝다. 평안도 사람들의 ‘ㅈ’ 발음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다른 지역에서는 ‘ㅈ’을 발음할 때 혀끝이 입천장의 딱딱한 부분에 닿지만 평안도에서는 잇몸의 바로 뒤에 닿는다. 그래서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ㄷ’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주스’와 ‘쥬스’가 발음상으로도 명확하게 구별되기도 하다. 이러한 발음은 함경도 일부 지역에서도 나타나는데 세종대왕 당시의 발음이 이랬으니 평안도 말이 과거의 ‘ㅈ’ 발음을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김정은 위원장의 ‘ㅈ’ 발음은 전형적인 평안도의 발음이 아니다. 가끔 평안도식 발음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른 지역의 발음, 결과적으로 남쪽의 ‘ㅈ’ 발음과 같게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다. 부모가 모두 평양 출신이고 평양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어머니는 제주도 출신의 재일교포이고, 김 위원장은 원산에서 태어났다. 특수한 신분이니 평양에서 성장했을지라도 일반인과 똑같이 평안도 말 환경에 노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2년간의 스위스 유학 경험도 있다. 이러한 성장배경 때문에 김 위원장의 말은 완벽한 혹은 일반적인 평안도 말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김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층의 공식적인 말, 나아가 신분과 관계없이 북한 사람들의 공식적인 말투이다. 이들의 연설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말을 들어보면 꽤나 잘 들린다. 익숙하지 않아 거칠게 들릴 수 있는 평안도나 함경도의 말씨도 잘 안 드러난다. 가끔씩 끼어드는 생경한 어휘와 표현을 제외하면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말이다. 이는 분단 이후 서로 다른 어문규범이 적용되고 있을지라도 분단 이전의 공식적인 말투와 문어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일상의 말은 본래부터 달랐고 더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인 말투와 문어는 공통성이 더 많은 상황이다.

북한의 지도층 인사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문화어 규범을 충실하게 따른다. 분단 이전에 맞춤법 및 표준어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새롭게 문화어 규범을 제정했지만 이것이 이전의 규범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이전 규범의 큰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평안도나 함경도 말의 특성, 체제의 특성, 그리고 새롭게 세운 기준 몇 가지가 반영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달라진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면 남북의 규범이 많이 다르게 느껴질 수가 있다. 그러나 다를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들이 다르게 적용한 원칙 몇 가지를 제외하면 규범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이유로 김 위원장의 말은 발음의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잘 전달되는 것이다.

‘로동’의 ‘력사’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 2018년 판문점 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이 방명록에 남긴 문구는 이랬다. 그런데 김 위원장의 독특한 필체 때문에 ‘력사’인지, ‘역사’인지 헷갈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에서는 ‘역사’와 ‘력사’, ‘노동’과 ‘로동’이 번갈아 나타난다. 규범이 엄격히 지켜지는 북한의 현실을 감안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김 위원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규정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북한말을 들을 때마다 가장 먼저 들리는 것, 그리고 규범의 차이를 논할 때마다 가장 앞자리에 놓이는 것이 소위 ‘두음법칙’과 관련된 것들이다. 북한에서는 한자어에서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아 ‘노인(老人)’과 ‘역사(歷史)’를 한자의 본래 발음에 따라 ‘로인’과 ‘력사’로 쓰고 말한다. 이것이 북한말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여기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이것은 규범일 뿐 현실이 아니다. 평안도나 함경도 말에서도 본래 ‘노인’과 ‘역사’였는데 문화어 규범을 만들면서 ‘로인’과 ‘력사’로 규정한 것이다. 한자의 발음은 위치와 상관없이 같게 발음하고 표기하자는 원칙을 정한 것이니 그저 규정일 뿐이다. 이것이 현실과는 달랐지만 규범이 엄격하게 시행되니 모두가 그렇게 따를 뿐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 규범과 조금 다르다. 원고가 있을 터이니 원고의 표기대로 읽을 때는 ‘력사’와 ‘로동’이다. 그러나 자유롭게 말하듯이 할 때는 ‘역사’와 ‘노동’이다. 이는 규범이 현실을 이기지 못함을 보여준다. 현실과 다르게 정해진 규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하니 다른 사람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모두가 지키지만 상대적으로 그 규범에서 자유로운 김 위원장은 규범은 어겼지만 자연스러운 현실 발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곧 두음법칙과 관련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은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는 규범이지만 현실과 다른 규범이니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규범은 자연스럽게 폐기될 수 있는 것이다.

‘삶은 소대가리’와 ‘사람답게 살고 싶다’

북한말에 대한 강렬하지만 부정적인 인상의 주범 중 하나는 검은 치마에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나와 배 속에서부터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도발적인 멘트를 날리는 리춘히 아나운서이다. 북한에서는 ‘기백 있는 음성’이라고 하지만 남한에서는 듣기 어려운 음성과 억양에 호전적인 내용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이뿐만 아니라 통일 업무를 담당하는 공식 기관에서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주요 관리들마저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리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나 ‘겁먹은 개가 더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두가 이해하기 어렵고 모욕적인 표현이다.

김 위원장의 동생이자 권력서열 2위인 김여정 부부장 또한 막말 대열에 합류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당시에는 웃는 얼굴에 상냥한 말투로 안내하던 그가 남한과 미국의 정치인과 대통령을 향해 ‘개 짖는 소리, 저 천치바보, 늙은이의 망언, 못난 인간’ 등의 막말을 퍼붓는다. 코로나19 유행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는 ‘남조선 것들의 물건짝’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의 지위와 맡은 일, 그리고 공식적인 담화나 연설임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와 외교의 수사로는 적절하지 않은 이런 막말은 북한말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더 강화시킨다. 나아가 북한말 자체가 이처럼 호전적이고 거칠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남북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나타나는 이러한 막말은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막말은 남한을 자극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북한 내부에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적개심을 더 강력하게 담을수록 남한에 대한 자극은 커지고 내부에 던지는 메시지는 강해진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강도가 더해질 수밖에 없다. 구호의 선명성과 호전성이 생명이니 새로운 표현이 개발되고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발전한다. 대남 메시지를 작성하는 기관과 담당자들에게 주어지는 막말의 악순환이기도 하다.

그런데 북한의 주민, 아니 ‘인민’들이 작성한 ‘삐라(전단)’나 벽서의 문구는 이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삐라나 벽서는 선전·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 그 문구는 선명하면서도 강력해야 한다. 북한의 체제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인민들이 작성한 문구이니 큰 기대를 하게 되지만 싱겁고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김정은을 위해 일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자”나 “김정은 시대는 끝났다”가 현 체제에 대한 반감을 대변한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거나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문구이다. 그나마 “김여정은 악종”이나 “김정은 개○○야, 너 때문에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가 적개심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문구이다.

기관이나 정치인들의 대남 구호나 발언의 수위에는 턱없이 모자란 이러한 문구들은 북한말에 대한 선입견이나 오해를 씻어준다. 한국전쟁을 묘사한 영화를 보면 북한 사람들은 ‘종 간나 새끼’란 욕을 입에 달고 살 것 같다. 점잖게 말해야 할 지도층 인사가 쏟아내는 막말을 보면 일반인들은 훨씬 더 험한 말을 쏟아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남쪽의 우리가 쓰는 만큼의 욕설과 험한 말을 쓴다. 살기가 팍팍해지고 주변의 압박이 심해지면 말 또한 영향을 받겠지만 본래의 말과 표현이 험하고 호전적인 것은 아니다.

청바지와 ‘막대 기억기’에 거는 기대

청바지와 흰옷을 같이 빨면 흰옷에 푸른색이 밴다. 김정은 위원장이 연설에서 남한말을 썼다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배어든 말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오빠, 파이팅, 님’이 금지된 말이다. 청바지의 푸른 물이 스며들 듯 북한말에 스며든 남한의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알판’과 ‘막대 기억기’, 그리고 전파를 통해 북한에 스며들었다. CD와 USB에 담긴 남한의 노래, 영화, 드라마가 중국을 통해 유입되어 널리 퍼진다. 전파는 국경이 없고 인터넷은 선만 깔려 있으면 어디든 통한다. 이런 경로로 남한의 말이 자연스럽게 전파된다. 북한 당국에서 막으려 노력하지만 청바지를 아예 입지 않는 한 푸른 물이 배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남북한의 TV 송수신 방식이 같았다면 이미 통일이 되었거나 통일을 훨씬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문화와 말의 힘이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TV가 아니더라도 다른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말은 이미 남북의 소통 가능성을 확대해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ㅈ’ 발음과 유사한 변화가 평안도 말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면, 남한의 젊은층에서는 평안도와 유사한 ‘ㅈ’ 발음이 점차 늘고 있다.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말소리마저 비슷해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러 찾아서 보고 들을 필요는 없지만 북한 지도자의 말이나 방송에 눈과 귀를 집중해보자. 이미 북한에는 남한의 말이 스며들고 있는 상황, 착각과 선입견을 걷어내면 잘 들리니 그렇게 말이 통하면 통일도 앞당겨진다.

■필자 한성우

경향신문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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