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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현장] 화장실 표시부터 달라…일본엔 치매노인 위한 도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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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달 26일 찾은 일본 남부 규슈에 있는 ‘후쿠오카시 인지증(치매) 프렌들리 센터’에서 치매 증상이 있는 어르신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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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찾은 일본 남부 규슈에 있는 ‘후쿠오카시 인지증(치매) 프렌들리 센터’. 화장실 입구에 좀 특이한 안내판이 그려져 있다. 여자 화장실엔 사람이 변기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남자 화장실엔 변기 앞에 서 있는 그림이다. 다소 민망할 수도 있지만,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센터 직원 안도 유키코는 “딱 봤을 때 어떤 장소인지 쉽게 알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 증상이 있는 경우 기존 화장실에 붙어 있는 표시를 남자·여자로만 인식해 화장실을 찾지 못하는 사례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이 센터는 화장실뿐 아니라 접수처, 세미나실, 상담실 등 그림만 봐도 어떤 곳인지 금방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센터가 신경을 쓴 것은 그림만이 아니다. 어떤 곳인지 문자로 함께 설명해주고, 색을 대조해 눈에 잘 띄도록 했으며 조명을 충분히 설치해 밝게 유지하고 있다. 직원 안도는 “치매 당사자도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장소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굉장히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치매에 걸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거리 감각이나 사물을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등 기능이 떨어진다. 이 센터는 영국 스털링대학 치매서비스개발센터(DSDC)로부터 치매 디자인 인증에서 최고 등급인 ‘골드’를 받았다. 일본 공공시설에선 처음이다.

65살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29.1%로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은 치매 문제를 놓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후생노동성이 지난 5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65살 이상 치매 환자가 2022년 443만명(65살 고령자 중 12.3%)에서 2030년 523만명(14.2%)으로 8년 만에 80만명이 늘어나고, 2040년 584만명(14.9%), 2060년 645만명(17.7%)까지 치솟을 것으로 추계됐다. 기억력 저하 등 치매 전 단계인 ‘경도인지장애’(MCI)까지 합하면 일본에선 이미 1천만명이 넘는 노인들이 치매 또는 그 직전에 놓여 있다.

일본은 올해 1월부터 최초의 치매 관련 법률인 ‘공생사회 실현을 위한 인지증 기본법’을 시행하고 있다. ‘초고령 사회’인 일본에서 치매 문제를 피할 수 없는 만큼, 예방·치료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다. 치매 환자와 가족들이 편견이나 고립된 간병으로 ‘치매에 걸리면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2004년 어리석다는 의미가 들어간 ‘치매’를 ‘인지증’으로 용어를 바꾸고, ‘치매 도우미’ 양성, ‘치매 시책 추진 5개년 계획’(오렌지 플랜) 등 지원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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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오카시는 치매 환자들도 알기 쉬운 ‘치매 프렌들리 디자인’ 사업을 하고 있다. 왼쪽은 후쿠오카시 중심에 있는 공중화장실이고, 오른쪽은 ‘후쿠오카시 인지증(치매) 프렌들리 센터’ 화장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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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시는 일본에서 치매 정책과 관련해 가장 앞선 지역 중 한 곳이다. 인구 164만명 중 65살 이상이 약 35만명(22.2%)으로 고령화 비율이 일본 평균보다 낮지만, 일찍부터 미래를 내다봤다. 시는 ‘100세 시대’를 맞아 개인의 행복과 지속 가능한 사회를 동시에 이루기 위해 구체적 행동에 나선 ‘후쿠오카 100’ 프로젝트를 2017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첫번째 목표가 치매에 걸리더라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지역을 만들자는 ‘치매 프렌들리 도시’다. 민영방송 아나운서 출신으로 2010년 35살에 처음 후쿠오카시장에 당선돼 4선째인 다카시마 소이치로 시장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후쿠오카시 인지증 프렌들리 센터’는 시가 치매 정책을 실행하는 데 ‘거점’ 같은 곳이다. 30년 가까이 노인 요양 쪽 업무를 해온 도 가즈히로(50) 센터장은 “후쿠오카시의 새로운 도전이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시에선 ‘휴머니튜드’(인간과 태도의 합성어) 돌봄을 확산시키고 있다. 치매 환자를 관리가 아닌 존중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돌봄 기법이다. 프랑스에서 개발됐고 ‘당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접촉 방법 등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치매 환자의 공격 행동 빈도가 줄어드는 등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발표됐다. 도 센터장은 “후쿠오카시에 있는 학교, 노인 관련 시설 등 지금까지 약 2만명이 휴머니튜드 교육을 받았다. 치매 당사자와 제대로 눈을 바라보며 말하기 등 2~3시간이면 익힐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지역의 많은 시민이 치매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치매 프렌들리 디자인’도 공들이는 사업이다. 시는 ‘치매 당사자에게도 좋은 디자인’ 안내 설명서를 만들어 누리집에 공개하고 있다. 센터를 포함해 노인 시설이나 공중화장실, 구청 신청사 등 현재 50곳 이상에서 치매 환자도 알기 쉬운 새 디자인이 도입됐다. 지난달엔 시내 하시모토역 광장이 ‘치매에 친절한 디자인’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실외에서 활용된 것은 일본에서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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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리면 집에만 있는 경우가 많아 상태가 더 악화됩니다. 왜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지 살펴야 해요. 예를 들어 버스 타기가 힘들어 나가지 못하면, 타기 쉽게 만들면 됩니다.” 도 센터장은 “치매 당사자가 살기 좋으면, 모두 살기 좋은 곳이 된다. 사회의 인프라와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들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도 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기업과 협력해 취업 기회를 만들거나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 치매 환자들이 쓰기 편리한 제품을 새롭게 개발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묶지 않아도 되는 앞치마,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원예 가방, 고령자도 사용하기 쉬운 가스레인지가 이미 개발됐다. 도 센터장은 “기업에서 치매 당사자를 도와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마켓(시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서로 윈윈하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치매 프렌들리 센터’가 생기면서 후쿠오카시가 추진하는 치매 정책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센터에선 휴머니튜드 교육부터 치매 환자를 위한 친절한 디자인 홍보와 제품 개발 협조, 증강현실(AR)을 이용한 치매 체험도 할 수 있다. 치매 환자가 찾아와 편하게 쉬었다 가기도 하고, 치매 가족들을 위해 상담도 해주고 있다. 돌봄·재가 의료 서비스 등을 하는 ㈜메디바가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1년 동안 1천명 정도 방문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9개월 만에 약 6천명이 찾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치매에 관심이 높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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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가즈히로 ‘후쿠오카시 인지증(치매) 프렌들리 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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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에선 치매 당사자가 일도 하고 있다. 치매 환자와 함께 대화하고, 방문객 안내 등을 맡고 있다. 70대인 다케타니 기요미 어르신은 “여기 사람들도 좋고, 일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며 활짝 웃었다. 일주일에 두번 15분 거리에 있는 집에서 혼자 출퇴근을 하고 있다. 가끔 요일·시간을 착각하거나 길을 못 찾을 때도 있지만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도 센터장은 “처음엔 아내 없이 외출도 힘들어했다”며 “할 수 있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이 늘어나면 치매 환자들의 상태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개호 보험(한국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어려운 재정 상황, 부족한 돌봄 서비스 등 일본도 치매 복지와 관련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다. 하지만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모습은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 센터장은 “앞으로 치매는 ‘다수파’가 될 것이다. 자신이 치매 증상이 있다고 밝힐 수 있고, ‘치매여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쿠오카/글·사진 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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