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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한국서 8년 만에 역주행… 단편은 찰나의 순간을 깊이 파고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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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현대 단편의 대가 앤드루 포터

“단편소설의 매력이요? 한 인물의 삶을 살짝 들여다보는 찰나의 순간에 있죠. 대신 주어진 몇 페이지 안에서 깊숙이 파고들어야 해요.”

‘미국 현대 단편 문학의 기수’로 자리매김한 소설가 앤드루 포터(52)가 서울국제도서전 행사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에서 그를 만났다. “한 사람으로서는 ‘친절함(kindness)’, 작가로서는 ‘솔직함(honesty)’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꾸밈없이 웃으며 답했다.

포터는 2008년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받는 등 미국 평단에서 호평받았다. 2011년 한국에도 번역·출간됐지만 큰 반응은 없었다. 이후 2013년 소설가 김영하가 팟캐스트에서 이 소설을 언급하면서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소설가들이 좋아하는 소설가’로 유명세를 치렀다. 그러다 2019년 재출간되면서 가수 아이유를 비롯해 배우 유인나·박정민 등이 그의 책을 추천했고, 출간 8년 만에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한국 독자들의 남다른 사랑을 받은 비결은 뭘까. 포터는 “나도 그걸 여태 알아내려는 중”이라며 웃었다. “딱 떨어지지 않는 모호한 감정과 분위기에 공명한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

왼쪽부터 첫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지난해 출간된 단편집 '사라진 것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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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출간된 단편집 ‘사라진 것들’에 실린 열다섯 편의 단편은 40대에 접어든 인물들이 주인공. 그는 이번 소설집을 “’중년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중년의 삶에선 무엇이 사라질까. 그는 “많은 것이 사라진다. 젊은 시절의 내가 사라졌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시점인 동시에 젊은 날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시작되는 때”라고 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오스틴’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파장 무렵의 파티, 얼큰한 취기가 가실 무렵.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들이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누군가는 들떠서 쉽게 말을 뱉고, 누군가는 기분이 상해 자리를 뜬다. 포터는 “불현듯 떠오르는 이미지가 내 소설의 영감이 된다. 모닥불 앞에 여럿이 빙 둘러앉은 이미지가 이 소설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유난히 1인칭을 선호한다. 3인칭 소설은 장편 ‘어떤 날들’뿐이다. 그는 “기억의 문제를 주로 다루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회상하는 데는 1인칭이 가장 적합하다고 느껴요.” 텍사스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그는 희뿌연 소설을 쓴다. 물 위에서 부유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곳에선 여름에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가지 않고, 사람들이 아주 느리게 움직여요. 더위가 주는 고요함이 소설에 녹아든 것 같아요.”

다작가는 아니지만 무언가 허투루 하는 법은 없는 듯했다. 장편 ‘어떤 날들’(2012)’ 이후 약 10년 만에 단편 ‘사라진 것들’을 펴냈다. “왜 이리 오래 걸렸느냐” 묻자 그는 “육아하느라…”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두 아이가 1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제대로 창작 활동을 할 짬이 났습니다.” 미 트리니티대 문예창작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가르치는 삶과 쓰는 삶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했다. 알고 보니 자신의 소설 쓰기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과제로 내준 플래시 픽션(초단편)을 교수인 그도 썼고, 이를 이번 소설집에 실은 ‘성실한 교수님’이었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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