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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슈 질병과 위생관리

83살 노시인은 4·3을 시로 증언했고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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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5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직권재심 재판을 마치고 나오는 김충림 시인.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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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은 불타고/ 외삼촌이 경찰에 붙잡혀 가자/ 외할머니는 남은 가족들/ 작은이모 외숙모 두 살과 여섯 살 외사촌 오누이를 데리고/ 이웃 노인들과 더불어 귀한 목숨 부지하려고/ 마을 근처에 있는 빌레못굴에 숨어들었네.”



아들과 함께 함께 법정에 선 80대 초의 노시인 김충림(83)씨가 때로는 담담한 듯, 때로는 떨리는 듯 시를 읽어내려갔다. 25일 열린 제주4·3사건 직권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 김 시인은 사연을 말하는 대신 직접 쓴 시를 갖고 와 어머니로부터 들은 당시의 참상을 `어머니의 가슴앓이병'이라는 시로 대신했다. 방청석에 앉은 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손수건을 꺼냈다.



2019년 늦은 나이에 등단 김 시인의 어머니 가족은 4·3의 상징적인 비극 가운데 하나인 제주시 애월읍 빌레못굴의 학살 속에서 스러져갔다.



“동백이 빨갛게 피어나고 하얀 눈발 내리던 날/ 하늘도 태양을 가리고 검은 구름을 드리운/ 무자년 을축월 병오일/ 마을을 수색하던 토벌대에 빌레못굴 발각되어/ 나오면 살려준다는 회유의 말을 믿고/ 굴에서 나온 30여명의 촌민들을 향해 무참히 총질하였지.”



1949년 1월16일, 애월읍 어음리 중산간의 빌레못굴에서는 굴속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토벌대에 학살됐다. 시인의 외할머니를 비롯해 막내 이모와 외숙모, 두 살, 여섯 살짜리 외사촌 등 5명이 한날 희생됐다. 두 살, 여섯 살 조카의 아버지이자 김 시인의 외삼촌은 대전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행방불명됐다. 가족의 절멸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했던 집안의 큰딸 어머니는 평생 가슴앓이를 하며 살다 세상을 떠났다.



“눈망울 초롱초롱 할머니 품에 안겨 울부짖는/ 두 살배기 외사촌 동생은 억센 손아귀에 발목 잡혀/ 돌담에 팽개쳐 핏덩이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네/ 맨 뒤에 기어 나오던 외숙모와 외사촌 누이는/ 총소리와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 굴속 깊숙이 숨어버렸지.”



당시 토벌대에 잡히지 않았던 모녀는 굴 안 어둠 속에서 숨졌다. 이들의 주검은 1971년 3월 빌레못굴 탐사반에 발견돼 유족에게 인계돼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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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굴 입구.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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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언어로 표현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장면은 훗날 이곳에서 살아난 주민들의 기억을 통해 전해졌다. 당시 주민들과 함께 빌레못굴에 피신했다가 몸을 숨겨 학살현장에서 살아난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굴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그림자가 어른어른 보였어. 민보단과 경찰, 군인들이었어. ‘살려줄 테니 나오라’고 해도 나는 나가지 않고 돌 틈에 숨었지. 굴속에 있던 사람들이 잡혀 나가는 것이 보였지. 그 사람들이 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죽였어. 경찰은 어린아이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거꾸로 메쳐 죽여버렸어.” (제주4·3연구소 증언집 ‘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이름도 없는 아이는 시인의 외조카다. 당시 빌레못굴과 숨어 살던 주민 30여명 가운데 25명이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발각돼 집단학살됐다.



기자는 지난 2020년 7월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고 천연기념물 제342호로 지정된 이 굴에 들어간 적이 있다. 빌레못굴은 전체 길이가 11.7㎞에 이르러 국내에서 가장 긴 굴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는 철문으로 봉쇄한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의 급경사로 된 굴 입구를 들어서 5m 정도 가면 돌이 평편하게 다져졌고, 옹기 파편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주민들이 피신했던 흔적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간간이 하얀 사기그릇 파편도 있다. ‘소화 13년’, ‘소화 10년’이라고 적힌 일본 동전들과 부녀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빗, 녹슨 비녀도 눈에 띄었다. 주민들이 식량을 갖고 와 음식을 만들었던 화덕과 깨진 무쇠솥 파편도 보였다. 굴은 50~60m 정도 더 들어가자 수십명이 충분히 서 있을 정도의 공간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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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비녀와 일본 동전, 사기그릇 파편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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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을 수습하여 장례식도 못 차리고/ 살던 집 훤히 보이는/ 동산 밭 언덕바지에 묻을 때/ 어머니는 몇 번이나 혼절하였네/…/언젠가는 돌아오리라/ 실 날 같은 희망으로 기다리던/ 대전형무소로 끌려간 외삼촌은/ 6·25 때 행방불명으로 소식이 끊김으로/ 단란했던 친정 여섯 명의 식구를 삽시간에 잃어버리는/ 처참한 운명의 중심에 서게 되신 어머니.”



그 어머니는 평생 가슴앓이를 하며 살았다.



“육신은 땅에 묻었지만/ 가족들 혼백은 가슴에 묻어/ 새벽녘이면 가슴을 쓸어안고/ 쑥쑥 찌르는 아픔/ 평생의 고질병을 안고/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살다 가셨네.”



훗날 대전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강주남은 가족들 사이에서는 어릴 때 강규남으로 불렸다.



법정에 함께 나온 시인의 아들(55)은 “할머니(강주남의 누나)는 당시 빌레못굴에서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가해자는 아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에서 자주 무전 취식하던 경찰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억장이 무너졌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방선옥)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합동수행단’이 청구한 고 강주남 등 제50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대상자 30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방 부장판사는 “2019년에 제주에 처음 와 처음 방문한 4·3 유적지가 빌레못동굴이다. 빌레못동굴을 갈 때 당시 희생자들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분들의 가족을 오늘 만나게 됐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날 군사재판 직권재심을 포함해 지금까지 무죄가 선고된 4·3희생자는 1452명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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