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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특별기고]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자유주의의 외로운 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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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레이몽 아롱은 교수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에서 드골 장군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자유 프랑스'지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후 그는 다시 대학교수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르 피가로'지의 정규 칼럼니스트로서 30년 이상 머물렀다. 파리의 유명한 지식인들 가운데 평생 교육자로 남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많은 책을 출판했으며 그것 중 26권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잘 알려진 것들 가운데에는 '평화와 전쟁: 국제관계의 입문서', '지식인들의 아편', '클라우제비츠: 전쟁철학자', '제국의 공화국: 미국과 세계, 1945-1973', 그리고 '타락한 유럽의 변호' 등이 있다.

레이몽 아롱은 프랑스의 지적 유행에서 벗어난 지성인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서보다 사회학자로서, 정치학자로서, 그리고 철학자로서 외국의 학계에서 더 영향력을 가졌다. 그의 견해는 미국, 영국, 그리고 독일 정치인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다. 프랑스에서 그의 견해는 생애의 말기에 프랑스 지성인들이 오랜 좌익에서 회복되어 여전히 남아 있는 그들의 위대한 사상가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지도와 영감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외로운 목소리였다. 1980년 두 명의 좌파 교수와 언론인과 가진 두 차례의 텔레비전 토론이 거대한 성공을 거두어 갑자기 그가 추구하지 않은 지위인 웅장한 파리 식으로 그를 유행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그가 보는 진리에 대한 고독한 헌신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의 가르침은 그가 대변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본질인 고도의 이성과 자유에 헌신하는 한 세대 학생들의 지적 형성에 기여했다. 레이몽 아롱은 반세기 동안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들에 관해 옳았다. 그는 히틀러에 관해서 옳았으며 스탈린에 관해서도 옳았다. 그는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최선이며 인류의 희망임을 주장했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의 시류에 의해 제기되는 지적 도전에 맞서려고 했다. 그는 지적 유행, 즉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했으며 교리주의나 분노함이 없이 그렇게 했다. 그는 미국을 이해한 프랑스인이었으며 그는 진정으로 미국을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는 미국과 유럽의 완전한 연결이었다. 그에게 시대적 문제는 서방의 자유와 소련 폭정의 대립이었다. 그는 냉전체제를 "전쟁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특징지었다.

레이몽 아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는 정치학자였다. 인간은 원래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는 인간 존재의 한 차원이지 비정치적 세력의 산물이 아니다. 경제학, 인류학, 사회학 그리고 심리학 등의 파생물이 절대 아니다. 그에게 정치학은 정의의 사랑과 영광이 굶주림이나 성적 욕망처럼 주된 것이며 정치는 윤리학이나 심리학에 앞선다.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의로움을 자처하는 국가의 정체들을 수립하고 그것들에 맞는 법들을 제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들에 따라 수립되는 권위적 지평은 바로 인간의 의도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에 관한 이런 공부와 실천의 토대는 몰락했지만, 아롱은 거기에 굳건하게 서 있었으며 그의 생애는 그런 정치적 가능성의 구현이었다.

레이몽 아롱은 자유주의의 마지막 위대한 부엉이였다. 그는 자유주의 이론의 진리를 믿었으며 그에게 자유주의의 실천은 최선의 가용한 대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간단히 최선이었다. 권리의 상호 존중이 자유주의 신념의 본질이었다. 이런 면이 현실에서는 아주 드물고 또 점점 드물게 되었다. 아롱은 그런 존중을 소유했다. 그는 결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는 1970년대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신(新)보수주의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신(新)자유주의로 개명하게 되어 이념적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가 좌우의 급진주의자들에게는 보수주의자로 보였지만 인간의 본질적 권리에 기초하고 또 그것들을 보호하는 그의 정부형태는 좌우의 과거에 보이지 않았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위협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아롱의 자유주의는 로크. 몽테스키외, 그리고 어느 정도는 토크빌의 것이었다. 자유주의의 신념은 모든 인간의 자연적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당연하게 생명, 자유, 그리고 재산의 추구에 대한 불가양도의 권리들을 갖는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역시 당연하게 그런 권리를 인정하는 정부를 건설할 이유가 있다. 즉 정부는 피치자들의 동의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 요컨대 계몽이 가능하고 좋은 것이다.

레이몽 아롱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했기에 그는 민족주의자이기보다는 더 많이 사해동포주의자였다. 그는 어떤 문화나 종교보다는 과학의 보편적 원칙들에 더 많이 집착했다. 이것들은 그에게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들의 차이와 뿌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가 아주 드문 성취이기에 심한 도덕적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특수한 인종이나 문화에 속한다고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이고 문화적 차이에서 인간본성의 통일성 우선과 평화, 번영, 그리고 정의로운 질서를 향한 공통의 염원을 항상 파악했다. 이 모든 것은 건전성과 인간애의 놀라운 결합에 기여했다.

그는 비록 좀먹는 열정들이 그의 주변을 지배했던 시대에 살았지만, 그에게 그런 열정들이 전혀 없었다. 그는 비록 편파적이었지만 결코 남을 비방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는 비록 자유민주주의가 이기적 이익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이익들이 우리 공통의 고통에 토대를 준 공동의 이익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자유사회에 대한 기초적 해석에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비열하기 때문일 뿐만 아닐 그들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미묘한 혼합이다. 따라서 오직 높은 것만을 인정하는 것은 단지 고양하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낮은 것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은 왜곡이다. 인간들은 공동의 선을 추구하지만, 사적이익으로 공동의 선을 획득하는 것이 흔히 방지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에서는 아주 어리석은 순간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어리석거나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정부형태의 선호를 고려할 권리가 있음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레이몽 아롱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해방하는 교육의 힘을 믿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철학, 과학, 역사, 그리고 문학의 관점에서 삶과 사건들을 바라볼 기회를 믿었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배우고 낡은 권위를 타파하고 독자적으로 진리를 발견하는 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학이 민주사회에서 중심적 제도임을 알았기에 그는 1960년대에 서구의 대학들을 휩쓴 파괴의 물결에 아주 강력하게 반대했다. 대학은 자유 민주주의가 의지하는 이성이 단단히 존재하는 곳이다. 만일 그런 의지가 없다면 현대 민주주의에 있는 모든 합리적 권리가 사라질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고도 학습의 기준 존재를 관용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의문시될 것이다. 대학의 위기에 대한 그의 반응이 그의 모든 것을 완벽히 보여주었다. 그는 사상의 자유와 그런 자유사상이 고무하는 종류의 사회를 열렬히 사랑했다.

20세기의 정치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치명적 증오심으로, 배타적으로 정의되는 운동들과 정체들로부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그들의 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의 권리들이 부르주아 권리라고 합의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부르주아 사회와 동일시했으며 부르주아 사회를 이기심, 개인주의, 그리고 천박한 물질주의의 세계라고 특징지었다. 공산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성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파시즘은 이성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고집하면서 그러므로 그것을 열정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자유 민주주의의 합리적 정당성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권리의 상호인정을 위해 주장되는 따뜻한 도덕을 무시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 민주주의자인 아롱은 완벽한 부르주아였다.

이런 두 반(反)민주주의 운동 뒤에는 지난 2세기의 가장 강력한 사상이 있었다. 칸트 이래 자유주의는 철학적 지원을 받지 못했던 반면에 자유주의의 적들은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와 니체의 축복을 받았다. 오늘날 로크와 몽테스키외의 가르침을 기꺼이 옹호할 사람이 별로 없다. 자유주의의 좋은 의식은 녹슬고 대부분의 서구인은 자유주의적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유주의를 약화하는 상대주의가 자유주의의 건전한 회의론에서 생성되었다.

그러나 아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더 잘 연구했다. 그는 사르트르와 코제프를 잘 알고 있었고 하이데거를 주의 깊게 읽었다. 그는 이들에 관해서 지성적으로 말했지만,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처럼 열광할 수 없었다. 윈스턴 처칠이 시대착오적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시대착오적이었다. 야만의 시대가 지났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확신은 이런 신념의 오직 특별히 순진한 표현이다. 아롱에게는 무엇인가가 그의 시대와 환경에서 그렇게 만연한 허무주의(nothingness)에 관해 쉽게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히틀러는 그에게 강박적인 수수께끼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과거의 어둠에 호소하고 잔인한 미래를 내다보는 살인적 깡패가 세계에서 잘 교육받은 인민 중 하나에서 선택된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의 거대한 당혹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악이 선보다 더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적 인간성의 가능성에 관한 살아 있는 전범(典範)이었다. 그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살았던 사람이었다. 1990년 소련 공산주의 제국이 붕괴하였을 때 그것은 레이몽 아롱의 최종적 승리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1983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그의 필생 사명이었다. 필자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그의 제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책들을 통해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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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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