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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백남순 나온다”...방콕공항, 北 외무상 뜨자 취재진 엉켜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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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12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열린 태국 ARF서 ‘뉴스메이커’

北대표단과 취재진 100여명 엉킨 후 간신히 공항 빠져나가

6년 후 말레이시아 ARF에선 어떤 나라도 상대 안 해줘 굴욕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조선일보

2000년 첫 남북외무장관 회담장에서 악수하는 이정빈 외교부 장관과 백남순 외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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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입한 ARF서 스타 된 백남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 무드가 조성되자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 달 반 만에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이 평화 공세를 펴기에 좋은 기회라고 봤습니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의 후원으로 2000년 7월 26일부터 방콕에서 열린 ARF 외무장관 회의를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다자외교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당시 북한을 대표해 참석한 백남순 외무상은 ‘ARF의 스타’라고 불릴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북한이 ARF에 23번째 회원국으로 신규 가입하고, 김정일의 ‘러시아를 통한 미사일 시험발사’ 발언 등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백남순에 대한 세계 언론의 취재 열기였습니다.

백남순은 그해 7월 25일 저녁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VIP 통로를 이용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태국이 일부러 푸대접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각에 태국 공주가 공항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헌군주제인 태국에서는 왕실 행사가 최우선이기에 백남순은 일반 통로를 이용해 나와야 했습니다.

이는 기자들에게는 근접 취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의미합니다. 첫 남북 정상회담은 자유로운 취재가 불가능했던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언론은 북한이 허용하는 것 이상의 취재를 하거나 영상을 찍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커져 추가 보도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문과 방송은 그의 방콕 등장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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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25일 태국 방콕 공항의 일반 통로를 통해 입국한 백남순 북한 외무상(한 가운데)이 취재진과 엉켰다가 간신히 방콕 공항을 빠져나가는 모습.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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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F 회의 보도차 태국에 파견된 저는 백남순의 방콕 공항 도착을 취재하려고 공항에 나갔습니다. 현장에는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등에서 온 100여명의 내외신 취재기자, 사진기자, 방송기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일반인 출구 앞이라 별도의 경호원도 포토라인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백남순이 나온다”고 소리쳤습니다. 백남순이 로비로 나오는 순간 취재진이 한꺼번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북한 대표단과 취재진이 엉켜버렸습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불빛이 터졌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과 영상을 찍기 위한 몸싸움도 치열했습니다. 취재 기자들도 그의 발언을 듣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로 옆까지 달라 붙었습니다. 저도 그 속에 들어갔다가 밀려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자는 안경을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백남순의 경호 인력이 따로 있지 않아서 마치 럭비 경기의 스크럼처럼 한 덩어리가 돼 움직이다가 간신히 북한 대사관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자동차에 올라타고 떠났습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백남순이 무슨 말을 했는지 서로 맞춰보려고 했으나,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가 공항에서 나와서 사라질 때까지 10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우 길게 느껴졌습니다.

백남순, 이정빈 외교 만나자 “피는 물보다 진하다”

총 6명의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방콕에 도착한 백남순은 주로 한미일 취재진을 몰고 다니며 뉴스메이커가 됐습니다. 사상 첫 남북, 미북 외무장관 회담은 물론, 일본, 캐나다, 태국 등과 릴레이 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 전에는 국제회의장에서 기자들을 만나도 상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북한 대표단 중 한 명이 나중에 북한 외무상을 지낸 리용호 참사였습니다. 남북 대표단은 ARF 회의장인 방콕의 로열 오키드 쉐라톤호텔의 17층과 6층에 각각 자리잡고 필요하면 복도에서도 서로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외교관들은 서울에서 출장 간 외교부 기자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눠 “북한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백남순은 26일 남북외무장관 회담에서 이정빈 외교부 장관을 보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타국에 와서 이 선생을 만나서 기쁘다”고 했습니다. 이 장관이 “임동원 국정원장이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고 하자, 과거 남북회담 때 만났던 이동복 전 국회의원에 대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안부를 묻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두 장관은 40분간 회담에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대외 관계와 국제무대에서도 상호 협조해 나가기로 했다”는 공동발표문에 합의했습니다. 이날 회담엔 우리측에선 외교부의 장재룡 차관보, 최영진 외교정책실장이, 북한에서는 리용호 참사, 마철수 아시아태평양 국장 등이 배석했습니다.

사상 첫 남북외무장관이 끝난 직후, 1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회담 결과를 브리핑한 최영진 외교부 외교정책실장은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최 실장은 브리핑 도중 ‘쌍방은 남북공동선언을 바탕으로 대외관계와 국제무대에서 상호 협조해 나가기로 했다’는 발표문을 여러 차례 인용했습니다. 또 “이 장관이 다음번 유엔 총회에서 만날 때는 회담 대신 만찬이나 오찬으로 하자고 제의, 백 외무상이 동의할 정도로 우호적, 건설적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조선일보

조선일보 2000년 7월 29일자 1면. 한미 외무장관 회담과 미북 외무장관 회담 사진을 메인 사진으로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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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순은 28일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예정된 시간보다 20여분을 넘겨, 70여분 동안 샹그릴라 호텔에서 첫 미북 외무회담을 가졌습니다. 당시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에 대한 지지의사를 나타내려는 듯 노란색의 드레스를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회담이 끝난 후, “백 외무상은 매우 친절하고 외교적인 말을 구사하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올브라이트는 첫 만남에서부터 북한의 미사일개발 포기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백남순은 이에 대해 김정일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 간에 이 문제를 주제로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남북외무장관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정빈 장관은 출장 간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소회를 피력합니다. 그때 외교부는 남북정상회담 추진 및 개최 과정에서 소외돼 조직이 위축돼 있었습니다. 당시 남북 화해 정국의 주도권은 임동원 국정원장이 쥐고 있었는데, 이 장관은 남북외무장관회담으로 어느 정도 만회했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비밀로 했지만, 이 장관은 백남순에게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남북이 함께 만들어 유엔에서 통과시키자고 제의, 같은 해 10월 유엔총회에서 이를 통과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번 ARF에는 백 외무상이 스타가 될 텐데,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의연하게 행동하라”고 말한 사실을 공개합니다. ARF직전인 2000년 7월 19일부터 이틀간 푸틴이 북한을 방문한 것이 화제에 오르자 김정일의 ‘조건부 미사일 포기 ’ 발언이 “러시아가 양념을 넣었는지, 뺐는지 모른다”며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 “북, 평화 애호국에 합류시키엔 아직 이르다”

우리 정부가 첫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첫 남북외무장관회담으로 들떠 있을 때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7월 27일 사설을 통해 북한에 대한 경계감을 나타냈습니다. “북한이 현재 미국이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할 개혁의 초기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북한이 평화 애호국가들의 공동체에 합류했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 “고 한 겁니다. 이 신문은 북한을 방문한 푸틴이 감질나는 제안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해석했습니다. 1년에 최소 2개의 인공위성을 외국에서 발사하게 해준다면 장거리 미사일 계획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북한의 입장에 대해 “만일 북한이 외국에서 진보된 로켓을 제공받아 이 기술을 복제하기를 기대한다면, 이에 따른 위험은 감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은 일시 정지됐을 뿐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다”며 “북한이 평화 애호국 공동체에 합류했다고 결론짓기는 이르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같은 논조의 평가를 합니다. 북한의 외교공세에도 불구하고 그 진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간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백남순이 ARF에 참석, 한미일 외무장관 등과 회담을 열고 평화에 대해 말했으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의욕에 대한 우려를 제거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특히 김정일이 다른 국가가 위성발사설비를 제공한다면 미사일 개발계획을 포기하겠다는 제의를 한 것으로 보도됐으나 그 조건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2006년 ARF 회의장에서 아무도 백남순과 악수 안해

뉴욕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의 우려는 그대로 맞아들어갑니다. 북한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선의’를 활용해 핵과 미사일을 더욱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마찰을 빚습니다. 그러던 중 2006년 7월 28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ARF에서 백남순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세는 6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북한이 6자회담 거부와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규탄받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도발로 인한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ARF 의 주요 의제였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4시간 가까이 개최된 오전 세션이 끝나자 굳게 닫혀 있던 회의장 문이 살짝 열렸습니다. 당시 저는 회의장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예상보다 일찍 열린 문틈 사이로 회의장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25개 참가국 장관들이 서로 악수를 하며 삼삼오오 모여 환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백남순은 혼자였습니다.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다른 나라의 장관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리자오싱(李肇星) 당시 중국 외교부장도 악수를 청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장관들과 대화하기 위해 자리를 떴습니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외톨이’로 실제로 ‘왕따’를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ARF 참가국들은 6자회담을 거부하며 동북아시아의 불안을 심화시키는 북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세안 국가의 외교부 장관들은 ARF가 시작되기 전에 발표한 성명에 북한 비판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북한의 최근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강력히 비난한다”며 “북한이 유엔 결의 1874호에 따라 회담에 복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비공개 회의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의장을 쓸쓸하게 나서는 그에게 유일하게 다가가서 말을 붙인 이는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었습니다. 반 장관은 백남순에게 “남북이 한번 만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습니다. 백남순은 그런 반 장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며 퉁명스럽게 말한 후, 굳은 표정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북한 문제가 큰 뉴스가 될 때마다 백남순이 ARF 스타로 주목받다가 6년 뒤 어떤 나라의 장관도 그와 악수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장면이 오버랩 돼 떠 오르곤 합니다. 백남순은 2007년 사망했습니다.

P.S.

1. 2000년 방콕 ARF에 출장간 이정빈 외교부 장관의 동정도 주목받았습니다. 남북 외무장관 회담을 한국의 모든 신문이 1면 톱기사로, 모든 방송이 메인뉴스 톱 기사로 다뤘습니다. 한미 외무장관 회담도 관심을 끌면서 이 장관이 3일 연속 부각됐습니다. 그러자 이 장관의 측근 중 한 명이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이 장관이 ARF에서 너무 부각돼 기사가 많이 나오니 청와대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이제는 조금 작게 보도해 달라.” 이 장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이에 한국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어서 청와대 참모진 일각에서 외교부에 볼멘 소리를 했다는 후문입니다.

[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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