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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SF가 그리는 건 미래가 아니다… 잊힌 현실을 들여다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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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가 만난 사람] SF 작가 켄 리우

조선일보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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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랑전

켄 리우 단편집 |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504쪽 | 1만8000원

“저는 미국 작가이지 중국 작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중국 SF’와 연계돼 거론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 친구 류츠신의 책을 번역한 것은 맞습니다만, 번역은 제 본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국 SF와 류츠신에 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널리 이해 바랍니다.”

단편집 ‘은랑전’ 국내 출간을 계기로 세계적인 SF 작가 켄 리우(48)에게 이메일 인터뷰를 요청했다. 며칠 뒤 그가 보낸 답변은 이런 말로 시작했다. 그는 단편 ‘종이동물원’으로 2011년 휴고상·네뷸러상·세계환상문학상 등 SF 3관왕을 처음 달성한 작가다. 본지와는 6년 만의 인터뷰다.

켄 리우는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로 만들어져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류츠신의 소설 ‘삼체’를 영어로 번역해 2014년 영미권에 소개했다. 영어 번역판에서는 순서를 조금 바꿔 문화혁명 장면으로 소설을 시작하길 먼저 제안한 것도 그다. 2015년 류츠신이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휴고상을 수상한 데는 그의 공이 컸다. 다만 최근 중국 본토에서 ‘삼체’에 분노하는 여론이 들끓는 등 여러 복잡한 상황을 고려한 ‘신중한 무응답’으로 보인다.

‘은랑전’(원제: The Hidden Girl and Other stories)은 2020년 2월 미국에서 출간됐다.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쓰는 등 세상은 변화무쌍했다. 지난 4년간 작가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선일보

켄 리우. /Lisa Tang L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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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에게 ‘팬데믹’이란 사건은 남다를 것 같은데.

“자가 격리 기간에 고전과 친해졌다. 고대 로마 소설가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당나귀’, 존 밀턴의 ‘실낙원’을 다시 읽었다. 노자의 ‘도덕경’을 내 나름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팬데믹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꿨는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보일 것이다. 우리는 단기적 변화를 과대평가하고, 장기적 변화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팬데믹에 관한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들려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SF는 미래를 다루는데 세상은 급변한다. 4년 전 단편은 여전히 시의적절한가?

“어슐러 K. 르귄은 ‘SF는 판타지라는 유서 깊은 왕국에 가장 최근에 생긴 변방 영토’라고 말한 적이 있다. SF는 겉으로는 ‘미래’라는 탈을 썼을지 몰라도 실은 매우 신화 같은 장르다. 좋은 SF는 미래를 예견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면면 가운데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또렷이 그려낸다. 그렇기에 오래 살아남는다. 장차 수백 년, 수천 년 후의 독자를 생각하며 글을 쓰는데 4년의 시차가 뭐가 대단할까?”

–표제작 ‘은랑전’은 어떤 작품인가?

“당나라 시대의 전기소설을 개작해 새롭게 상상한 단편이다. 전기소설은 근본적으로 변신과 변화를 담은 이야기다. 소설에는 ‘수학적 마법’이 사용된다. 설화를 차원 간 이동에 관한 SF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현대사회에서 무엇이 우리를 개인적 책임과 윤리적 고민으로부터 자유롭게 할까 생각하며 썼다. 내 소설의 끈질긴 주제 중 하나가 ‘현대성(modernity)’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성해야 하는가다.”

–이번 단편집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꼽아봤다. 기억, 역사, 문명.

“거기에 ‘인간’과 ‘현대성’을 추가하고 싶다. ‘인간으로 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두 질문은 연결돼 있다. 내 생각에 현대성이란, 우리가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의 범주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가족 또한 당신 소설의 중요한 요소다. 서문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을 가르쳐주신 할머니 샤오첸에게 바친다’고 썼다.

“할머니가 베풀어준 사랑은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내가 사는 삶 자체가 할머니에게 바치는 최선의 찬사라고 생각한다. 할머니 덕에 만들어진 내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 전해줄 것이고, 그렇게 할머니는 계속 살아간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중요한 것들이 전해지는 방식이다.”

–당신의 글쓰기 원동력은?

“우리가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하는 일은 하나다. 우리 경험이 그리는 궤적을 이해하는 것. 우리 모두 ‘자기 삶’이라는 이야기의 저자다. 이런 맥락에서 나에게 글쓰기란, 의미를 찾는 것, 우주의 본질적인 무작위성을 받아들이는 것, 엔트로피라는 무한성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짧은 자기 인식의 순간을 어떻게 측정할까 고민하는 일이다.”

※인터뷰는 켄 리우의 영문 답변과 장성주 번역가의 한국어 번역을 함께 참고했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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