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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정작 女 사내이사, 그 회사엔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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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30대 그룹 여성 임원 7% 첫 돌파했지만…


“표면적으로는 늘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제자리걸음이다.”

한 대기업 임원이 재계 여성 임원 숫자를 두고 한 말이다. ‘늘었다’는 건 여성 임원 비중이다. 올해 국내 30대 그룹 여성 임원 비중은 처음으로 7%를 넘어섰다. 2018년 3%대에서 5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리더스인덱스가 30대 그룹 295개 기업의 올해 1분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올 1분기 기준 자산 상위 30대 그룹 사내·사외이사·미등기임원 수는 1만1321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1만1250명 대비 71명, 0.6% 증가했다. 주목할 점은 증가한 71명 가운데 69명이 여성 임원이라는 사실이다. 이 덕에 30대 그룹 여성 임원 수는 전체 임원 7.5%인 847명으로, 처음으로 7%를 넘어섰다. 지난해는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그룹이 한 곳(HMM) 있었다. 올해는 1분기 기준 여성 임원이 1명도 없는 그룹은 없다.

여성 임원이 늘어난 이유는 2022년 시행한 개정 자본시장법 덕이다. 이 법은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 이사회를 특정 성으로만 채우지 않도록 규정한다. 이사회 구성이 남성에 치우친 국내 기업 상황을 고려하면, 여성을 한 명이라도 회사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포함시켜 투명성을 높이라는 취지다.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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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그룹 중 8곳 여성 CEO

카카오·네이버 여성 임원도 ↑

여성 임원 비중이 높은 곳은 대체로 여성이 대표이사인 기업이다.

30대 그룹 중 여성 임원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은 카카오그룹이다. 지난해 임원 부도덕과 각종 사고로 쇄신을 선언한 카카오는 여성인 정신아 대표이사 체제로 움직인다. 정 대표는 카카오 컨트롤타워 격인 CA(Corporate Alignment)협의체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카카오그룹은 전체 임원 155명 중 여성 임원이 33명으로 21%가 넘는다.

최수연 대표가 이끄는 네이버에는 25명의 여성 임원이 있다. 비중은 18.7%에 달한다. 그 뒤로 신세계 17.8%(31명), 셀트리온 16.8%(18명), CJ 15.1%(44명), KT 10.8%(29명) 순이다. 절대적인 숫자로 따지면 여성 임원 수는 삼성이 169명(7.9%)으로 가장 많다. SK 108명(8.3%), LG 77명(7.6%), 현대차 69명(4.7%), 롯데 58명(8.9%) 등이 뒤를 잇는다.

30대 그룹에서 여성 대표이사는 정신아, 최수연 대표이사와 함께 이부진(호텔신라), 이정애(LG생활건강), 박애리(HS애드), 이선주(KTis), 한수미(SK그룹 계열 나래에너지서비스), 김제현(스튜디오드래곤) 등 8명이다. 30대 그룹 여성 상근 임원 중 최고령은 81세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 최연소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장녀인 35세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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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권 ‘유리천장’ 견고

LG그룹 그나마(?) 높아

여성 임원이 중요 직책에 포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여성 임원이 늘었다고 말하기 민망하다. 295개 기업 중 여성 임원이 없는 계열사는 87곳(29.5%)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98곳(33.2%)보다 11곳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30대 그룹 계열사 중 30% 가까이는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다는 의미다.

일례로 은행권 ‘유리천장’은 견고하다. 여성 직원이 50%로 절반을 차지하는데, 여성 임원은 7%대다. 금융당국이 ‘이사회 구성에서 성별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강하게 압박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남성 중심 경영 문화가 바뀌지 않았다. 특히 4대 금융지주 중 하나은행은 여성 임원이 1명(2.8%)에 불과하고, 인터넷은행 3사 중 케이뱅크는 여성 임원이 아예 없다.

더 깊이 살펴봐야 할 숫자는 여성 사내이사다. 여성 사내이사는 전체 사내이사 777명 중 3.2%인 25명으로 지난해 24명에서 1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30대 그룹 중 공시 대상 계열사에 여성 사내이사가 한 명도 없는 그룹은 2021년 말 22곳에서 최근 20곳으로 소폭 줄어드는 데 그쳤다. 한 예로 포스코그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여성을 이사회 구성원에 포함하지 않았다. 30대 그룹 중 계열사에 여성 사내이사가 있는 곳은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롯데, CJ, 네이버, KT, 한진, 카카오 등 10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나 정명이 현대커머셜 사장 등 오너가 사내이사 자리를 메웠다.

여성 사내이사 비중이 높은 그룹은 LG다. LG그룹의 여성 사내이사 비율은 11%가 넘는다. 사내이사 27명 중 3명이 여성이다. 이정애 LG생활건강 대표, 박애리 HS애드(옛 지투알) 대표와 LG유플러스 최고재무책임자(CFO)에 오른 여명희 전무 등이다. 삼성전자(4.2%), SK그룹(3.6%)도 여성 사내이사 수가 3명으로 LG그룹과 같았는데, 전체 인원수와 비교하면 LG 비율이 가장 높았다.

매경이코노미

오너·남성 중심 문화에

여성 사내이사는 ‘낙타와 바늘구멍’

재계에서는 사내이사는 찔끔 늘리거나 이사회 내 사외이사 자리에만 여성을 앉히며 구색을 맞췄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내이사는 여전히 남성 중심 이사회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개정된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등기임원 중 여성 이사 비중이 늘어난 건 의미 있다”면서도 “다양성 확보를 통해 의사 결정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여 경쟁력을 높이자는 본질적인 취지에 부합하기에 역부족이다”라고 평가했다.

여성이 사외이사에 치중된 원인으로는 ‘유리천장’이 꼽힌다. 국내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은 갈수록 활발해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여성 리더층이 얕고 고위직 임원 승진은 적다. 여성의 고위직, 주요직 진출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3월 발표한 ‘유리천장지수(The glass-ceiling index)’에서도 한국은 OECD 29개국 가운데 1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일하는 여성의 노동 참여율, 남녀 고등교육·소득 격차, 고위직 여성 비율 등의 지표를 반영해 2013년부터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매년 유리천장지수를 발표해왔다. 지수가 낮을수록 여성의 노동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오너가 주축이 되는 기업 지배구조는 여성이 사내이사로 들어가는 문을 더더욱 좁게 만든다는 분석이다. 박 대표는 “사내이사는 대표이사와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이 주축이 되는데 국내에서는 오너 일가가 경영에 참여하며 이런 요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설명했다.

가뜩이나 이사회 내 자리는 적은데 남은 자리마저 여전히 남성 중심 검찰, 법원 출신 관료가 30% 이상 상당 비율을 차지하다 보니 여성에게 열리는 문은 더욱 좁을 수밖에 없다. 올해 새로 추천된 사외이사 중 39.8%(41명)가 전직 관료 출신이고 그중 검찰청 출신이 19.5%(8명)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뒤이어 ▲판사(사법부) 출신 14.6% ▲국세청 12.2% ▲산자부 12.2% ▲금융위 7.3% ▲기획재정부 4.9% 등의 순이다. 예를 들어 삼성물산은 김경수 전 대구고검장을, 삼성화재는 성영훈 전 광주지검장을 선임했다. 롯데정밀화학은 봉욱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고검장), HD현대에너지솔루션은 여환섭 전 법무연수원장(고검장)을 각각 영입했다.

물론 이들 사례는 ‘사외이사’로 영입된 경우기는 하지만, 업종이 한정돼 있고 그나마 여성 발탁 가능성이 높은 사외이사마저 여성 후보가 15.8%(17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여성이 사내이사로 발탁될 확률은 더욱 하늘의 별 따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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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법조에 치중된 구성원

직군 범위 넓히고 지표 공개해야

재계에서나 학계에서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여성 사내외 이사의 역량을 강화할 체계적인 리더 육성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애초에 후보군 자체가 적으니 여성이 이사회에 합류할 확률도 적다는 취지에서다. A대기업의 한 여성 임원은 “기업 내 성 불평등 문화를 개선하고 출산과 육아에 따른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한 교육과 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면서도 “그럼에도 더 많은 예비 여성 사내외 이사 인재를 육성할 리더십 프로그램 기회는 많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한 글로벌 기업은 CEO 승계 작업에 나설 때 여성 후보가 없는 경우를 원천 배제하는 경우가 있다”며 “역차별이 되지 않는 선에서는 여성을 고려해야 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내 기업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숫자 맞추기에 급급할 뿐 정작 기업을 키울 여성 인재를 키우는 데 등한히 하는 경향이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기업이 여성 인재 육성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카드는 보수적인 카드업계에서 모범 사례로 꼽힌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지난 1월 “카드업계 여성 임원 20명 중 11명이 현대카드. 이건 딱히 자랑거리도 아니고 가끔 기사 보면서 신기하다 느낀다”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국내 8개 카드사 임원은 총 250명으로 이 중 여성이 32명(전체의 12.8%)이다. 정 부회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남길 때보다 숫자가 다소 늘었다. 현대카드는 전체 임원 62명 중 여성이 12명(19.8%)으로 임원 10명 중 2명꼴로 여성이었다. 국내 8개 카드사 중 여성 임원이 10명을 넘는 곳은 현대카드가 유일하다. 정태영 부회장은 “남자나 여자 개념이 없는 회사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현대카드는 2009년 현대자동차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여성 임원을 배출했다. 이후 여성 임원 비중은 2021년 16%에서 지난해 19%까지 늘어났다. 업무 영역도 다양하다. 현대카드의 여성 임원들은 브랜드, 리스크 관리, 재무, 정보 보안, 마케팅, 상품, 감사, 디지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재무와 감사 등 기존에 남성 임원이 독점하던 업무를 여성들이 맡고 있다. 여성 임원이 사외이사직을 맡거나 사내에서도 소비자 보호 등 한정적인 역할을 주로 하는 타 카드사와 대비된다는 평이다.

HD현대는 올해 16.8%인 여성 채용 비율을 2030년 30%로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여성 임원 양성을 위해 간부 육성 프로그램에 여성 직원 정원을 확대하고 사외 전문가 코칭 제도도 도입하기로 했다. 금융권에서는 신한금융이 여성 리더십 강화 멘토링 프로그램 ‘신한 쉬어로즈(SHeroes)’를 2018년부터 운영한다. KB금융 역시 올 3월 신임 여성 부점장을 대상으로 ‘WE STAR 멘토링 프로그램’을 개최하며 유리천장을 깨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성 할당제를 도입해서라도 사내이사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다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 인사에서 무조건 가산점을 주거나 할당제를 시행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역차별 문제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해 ESG연구소는 여성 이사 비율을 늘리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포괄적 의미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개정 자본시장법 취지대로 성별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과 분야 구성원으로 이사회를 채우면 여성 구성원도 자연스럽게 늘어난다는 것. ESG연구소는 “이사회 구성원의 역량과 배경이 다양할수록 중대 ESG 리스크 감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며 “관련 공시 수준 확대를 위한 노력 또한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구성원의 직무 다양성은 미국을 참고해볼 만하다. 경영자문 업체 스펜서스튜어트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S&P500 상장 기업에서 신규 선임 독립이사(사외이사) 388명 중 전·현직 최고경영자(CEO) 출신 비중이 30%로 가장 높았다.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재무 임원 출신 27%, 개별 부서장 출신 16%, P&L(손익) 리더 출신 10%, 회장·의장·최고운영책임자(COO) 출신은 4%로 집계됐다. 기업 관련 출신이 90%(87%)에 육박한다. 일례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기업은 이사회의 80%가량이 CEO 출신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ESG연구소는 “산업별로 여성이 특히 큰 역량을 발휘하는 직무가 있다”며 “이사회 구성원 배경과 직무를 다양하게 구성할수록 여성이 사내외 이사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정다운 기자 jeong.dawo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3호 (2024.06.12~2024.06.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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