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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다큐멘토링] 높으신 나리는 정말 나라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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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석 발행인]

백의종군했던 이순신이 마침내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왔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왜군이 다시 기승을 부리자 직職을 가진 모든 이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높으신 나리들이 내빼자 민심도 동요했다. 이게 어디 왜란을 겪던 시절만의 일일까. 지금 이 시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나라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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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나라는 결국 민중이 지탱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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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이순신을 통제사로 다시 임명했다는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칠천량 전투 패전으로 흩어졌던 장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597년 8월 5일, 이순신은 옥과현으로 들어서면서 이기남 부자父子를 만났다. 옥과 출신인 이기남은 날쌔고 용력도 출중해 이순신의 신뢰를 받으며 거북선 돌격대장으로 활약했지만, 원균에겐 축출당했다. 이기남은 다시 이순신을 따라나섰고, 이때 미리 도착해 있던 정사준과 그의 아우 정사립도 만났다.

6일에는 옥과현에서 머물며 정탐을 다녀온 최측근 참모 송대립에게 적의 움직임을 보고 받았다. 이순신은 전라도 내륙지역의 곡성을 기점으로 옥과를 거쳐 순천으로 남하하고 있었던 반면 왜적은 남원을 목표로 곡성으로 북상하던 상황이었다. 이때의 정탐은 이순신의 목숨과 수군 재건의 성패가 달려있는 문제였다.

이순신 일행은 7일 아침 서둘러 석곡으로 향했고, 이어 창천을 거쳐 순천 땅에 도착했다. 이때 전라병마도절제사 이복남이 거느리던 군사들이 모두 도망치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가는 자들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화살을 압수한 후 곡성현 석곡 강정에서 밤을 보냈다.

전라병사 이복남 남원성으로 도주 광양현감 구덕령, 나주판관 원종의 옥구현감 김희온 창고 바닥에 숨어 다음날인 8일, 새벽같이 길을 떠나 부유창(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창고를 바라보니 처참하게 타고 남은 재만 있었다. 이순신이 도착하기에 앞서 이미 전라병사 이복남이 병사들에게 불을 지르게 하고 자신은 남원성으로 달아났다.

광양현감 구덕령, 나주판관 원종의, 옥구현감 김희온 등 지방 관리들은 창고 바닥에 숨어 있었다. 이들은 이순신이 부유창에 들러 구치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배경남과 함께 쏜살같이 달려와 절을 했다.

이순신은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호령했다. "나라의 신하가 목숨을 던져 나서는 것이 도리이거늘, 왜 적을 피해 다니기만 하느냐?"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이복남 핑계를 댔다.

이순신이 다시 길을 떠나 순천부에 도착하니 성 안팎에는 인적도 없이 적막감만 돌았다. 이때 산에서만 기거했던 승려 혜희惠凞가 와서 알현하자 그에게 의병장 사령장을 주며 승군을 모아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순천성의 관사, 창고, 군기 등은 무사했다. 장전과 편전은 군관들을 시켜 나르게 하고 총통 등 무거운 무기들은 땅에 묻고 표시를 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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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관료들의 행태에 분노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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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날에 순천을 떠나 낙안군에 당도했다. 읍내로 들어가는 길 5리(2㎞) 전에서부터 이순신을 기다리던 백성들이 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환영의 눈물이었다. 이순신은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까닭이 뭐요?"라고 물어봤다.

한 노인이 이렇게 답했다. "병마도절제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떠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가다 대감께서 이 고을로 행차하신다 하기에 나온 것이오."

이순신이 낙안읍내로 들어가니 관청과 창고가 모두 타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은 말문을 열 때마다 눈물을 뿌렸다. 얼마 후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군수 고봉상이 산에서 내려와 인사를 올렸다. 저녁에 보성군 조성리에 위치한 조양창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으다. 다행히 창고에는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이순신은 군관 4명에게 창고를 지키게 하고 피난해버린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8월 10일. 이순신은 무리한 행군에 지친 나머지 당분간 보성 땅에서 머물기로 했다. 이날은 병세가 호전된 가선동지嘉善同知 배흥립이 찾아와 함께 머물렀었다. 11일에는 양상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송희립, 최대성을 만났다.

12일에는 거제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이 각각 병선 1척씩을 타고 와서 이순신 휘하로 배속됐다. 안위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장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병선 10여척을 몰고 회령포(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로 달아났다"고 보고했다.

이순신은 안타까움을 품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러울 뿐이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해 자신이 감당해내지도 못하는 지위까지 올라서 나랏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이순신은 당시에 만연했던 공직자들의 느슨함과 부정부패에 분노하는 심정을 여러 차례에 걸쳐 기록한 바 있다.

바로 다음날, 우후 이몽구가 이순신의 소집 명령을 받고 판옥선 1척을 몰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가 타고 온 배는 군기와 군량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이순신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곤장을 80대나 쳐서 보냈다. 한참 후에 하동현감 신진이 찾아와 경상도의 전황을 들려줬다.

"지난 3일 장군이 떠난 뒤에 악견산성을 지키던 우병사 김응서가 적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나서 미리 달아났습니다. 정개산성을 지키던 진주목사도 달아나 산성이 함락됐습니다. 더군다나 병마도절제사는 자기 손으로 바깥 진영에 불을 질렀습니다." 신진의 이같은 말에 이순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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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이순신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이때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분부를 전달하러 왔다. "수군이 지난 해전에 패한 결과로 전력이 약하니, 차라리 육지에서 도원수를 도와서 전쟁에 임하라. 임금은 이를 허락하노라." 이때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삼도수군통제사는 허울 좋은 이름뿐인가. 군량이 있나, 군사가 있나, 무기가 있나. 육군에 합류해봐야 오합지졸과 무엇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앞길엔 결국 모함과 죽음을 부르는 토사구팽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누군들 모르겠는가.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붓을 들어 장계를 써 내려갔다. 어쩌면 항명죄를 뒤집어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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