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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법원의 트렌스젠더 난민 인정, 이주민의 삶 개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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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기자(naeori@pressian.com)]
정부의 통계 예측에 따르면 한국은 저출산 기조의 심화로 2042년 총 인구 중 이주민 비중이 5%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이주민을 '동료 시민'으로 맞을 준비가 얼마나 돼있을까.

한 사회의 발전 방향과 속도를 가늠하는 잣대 중 하나가 법원 판결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이러한 측면에서 지난 2019년부터 이주민에 내려진 법원 판단 중 이주민 인권 개선에 기여한 '디딤돌 판결'과 방해가 된 '걸림돌 판결'을 선정해 발표해왔다.

변협은 지난 2022년부터 2023년까지 디딤돌·걸림돌 판결을 모아 지난 28일 서울 서초구 변협 회관에서 보고대회를 열고 발표했다. 변협이 선정한 디딤돌 판결 5개, 걸림돌 판결 7개, 주목 판결 7개 가운데 대표 사례를 소개한다.

디딤돌 판결 : 트랜스젠더를 난민으로 첫 인정

변협은 디딤돌 판결의 대표 사례로 지난 2022년 서울고등법원이 트랜스젠더를 난민으로 인정한 판결을 꼽았다.

말레이시아인 A씨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10세 무렵부터 여성으로서의 성별 정체성이 형성돼 15세 무렵부터 여성호르몬제 투약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4년 '여성처럼 보이게 하고 그러한 옷을 입은 혐의'로 체포됐다. 남성이 여성스러운 복장을 하거나 동성애를 하면 처벌하는 샤리아(이슬람 관습법) 형법 때문이다.

A씨는 결국 말레이시아 법원으로부터 950링깃(약 27만 원) 벌금형과 7일간의 구금형을 선고받았고, 이를 계기로 원고는 이민을 결심한다. 그는 2015년 10월 말레이시아를 떠나 호주로 이민을 계획했으나 불발됐고, 2017년 7월 한국으로 건너 와 난민 인정 신청을 했다.

재판에서 쟁점은 A씨가 난민법이 규정한 '난민'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난민법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해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외국인 등'을 난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출입국 당국과 1심 재판부는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없다", "원고는 말레이시아에서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상태로 취업하기도 했다"며 난민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A씨가 난민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난민법에 규정된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에 해당한다고 봤으며,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도 있다고도 봤다.

난민인권센터에서 활동하는 김연주 변호사는 "모든 사람은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과 관련된 박해를 포함하여, 어떤 박해를 피해 타국에서 비호를 구하고 향유할 권리가 있다"며 "해당 판결은 이와 같은 국제인권기준과 원칙에 입각하여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난민 지위를 인정한 첫 국내 판결"이라고 호평했다.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활동가인 타리는 "트랜스젠더 난민의 판결문이 디딤돌로 분류될 수 있는 날이 온 것이 매우 감격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난민 지침을 지키라는 요구가 와닿기 쉽지 않아보인다"면서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걸림돌 판결 : 원어민 교사 HIV 의무 검사에 대한 배상 불인정

대표적인 걸림돌 판결로는 법원이 원어민 강사에 대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의무 검사'로 발생한 인권 침해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사건이 선정됐다.

미국 국적의 A씨는 지난 2006년 2월 '회화지도(E-2)' 비자로 국내에 입국해 대학교 영어 과목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2009년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법무부 방침에 따라 비자를 연장하려면 에이즈 검사와 TBFE(마약 복용 여부)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고지를 받았다. 이에 A씨는 '사생활 침해이자 인권 존엄성에 반하는 처사'라며 이를 거부하고 2009년 7월 출국했다.

A씨는 같은 해 7월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장 및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A씨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13년 7월 유엔(UN) 자유권규약위원회(자유권규약위)에 개인 진정을 제기했고, 자유권규약위는 2018년 7월 'A씨가 불이익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릴만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심리부적격 판단을 내렸다.

자유권규약위는 다만 법무부의 에이즈 검사 지침에 대해서는 "폐지해야 하며, 이미 폐지했다면 재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를 냈다. 아울러 대한민국이 A씨의 권리를 침해한 점을 인정,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A씨는 이 내용을 토대로 지난 2020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법무부 지침이 시행된 초기에 경기도교육청에서 원어민 교사 3명이 에이즈 양성반응으로 채용 해지되는 등 효과가 있었고, 그 공익이 외국인들이 입게 될 사실상의 불이익보다 가볍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A씨에 대해 패소 결정을 내렸다.

송진성 법률사무소 지율 S&C 변호사는 "자유권규약위원회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도 HIV 강제검사를 체류자격의 조건으로 하는 당시 법무부의 정책이 자유권규약 및 인종차별철폐협약에 위반된다고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이에 대해 권고를 내린 바 있어 법무부는 늦게나마 스스로 위 정책을 철회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 법원은 출입국에 관한 사항이라는 이유를 들어 구체적인 설시 없이 출입국관리법에 의거한 것으로 적법하다는 결론을 내려 결과뿐만 아니라, 그 판시 내용에 대해서도 많은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고 비판했다.

이주영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는 "법무부의 출입국 관리 행위가 합리적 재량의 범위를 넘어 헌법상 기본권과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인권을 위반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어 좋은 접근인지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영훈 변협회장은 "이주민 숫자가 증가하고 있지만, 이주민의 인권과 삶의 질에 대해서는 특별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이주민이 체감하는 현실은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라며 "이주민 역시 존엄성을 갖는 인간으로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내국인과 다른대우를 받지 않아야 하고, 안정적인 근로 환경을 제공받는 등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프레시안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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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기자(naeor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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