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이유 따윈 필요 없단 걸 알았어.”
2014년 국내에선 ‘그녀’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 ‘허’(Her)에서 인공지능(AI)이 이렇게 속삭였을 때, 관객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남성 이야기’에 설득되고 말았다. 특유의 사랑스러운 비음과 억양이 어우러져 목소리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촉촉해졌기 때문이다. 목소리 연기를 맡은 이는 유명 배우 스칼릿 조핸슨이었다.
10년이 지난 2024년, 우리는 그 영화를 호명하며 신제품을 출시한 인공지능 회사에 의해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샘 올트먼 오픈에이아이(OpenAI) 최고경영자는 최근 강력한 음성 생성 기능을 더한 인공지능 ‘지피티-포오’(GPT-4o) 모델을 공개하며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단 한 단어를 올렸다. ‘그녀’(Her). 새 모델에서는 스칼릿 조핸슨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칼릿 조핸슨은 분노했다.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샘 올트먼이 지난해 9월에 이어 지피티-포오 발표 이틀 전에도 (내 목소리 사용 문제로) 연락을 해왔지만 제안을 거절했는데도 나와 흡사한 음성이 쓰였다”고 말하며 법적 대응을 시사하자, 오픈에이아이는 즉각 해당 음성 사용을 중단했다. 하지만 곧이어 오픈에이아이는 “해당 음성은 스칼릿 조핸슨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을 허가받고 쓴 것”이라 주장하는 중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특정 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모조 연기자를 제작할 때는 해당 배우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지난해 미국 할리우드에서 배우들이 파업까지 불사하며 만들어낸 단체협약 문구를 보면 오늘과 같은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지난해 7월에 시작된 배우들의 파업은 119일 동안 이어져 11월에야 끝났다. 단협에는 배우가 연기하지 않은 내용을 생성할 경우 48시간 전에 통지해 동의받아야 하고, 배우 고용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공지능을 쓰지 말라는 내용이 담겼다.
단협을 맺으면서도 모두가 ‘이 정도 협약만으로는 보호가 충분치 않을 것’을 알았다고 한다. 당시 파업과 시위에 참가했던 할리우드의 한 배우는 지난 1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내 목소리도 모습도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해 매우 큰 위협을 느낀다”고 했다. 우려했던 미래는 너무도 빨리 도래했고 우리에겐 대책이 거의 없다.
임지선 빅테크팀장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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