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존슨의 사진. 위키피디아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나는 밀덕이었다. 밀리터리 덕후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항덕이었다. 밀리터리 덕후 중에서도 항공기에 열광하는 덕후다. 내가 밀덕이 된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정도 시절이었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을 한다. 그 시절 아이들도 게임을 하긴 했다. 나도 일본에서 건너온 동키콩 게임기를 갖고 있었다. 한 게임기로는 하나의 게임밖에 할 수 없던 시절이다. 그러니 게임이 당대 초등학생들의 가장 인기 있는 놀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우리에게는 ‘프라모델’이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아카데미라는 회사에서 나온 온갖 밀리터리 프라모델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가격이 아주 저렴하지는 않아서 용돈으로 한달에 하나 정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처음 샀던 모델은 아마도 전투기 F-16이었던 것 같다. 참 아름다운 전투기였다.
가장 아름다운 항공기 SR-71
젊은 시절 항공기 모델을 테스트하고 있는 켈리 존슨. 위키피디아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나는 급속도로 프라모델에 빠져들었다. 내가 주로 구입했던 건 항공기였다. 팰컨(F-16), 이글(F-15), 톰캣(F-14) 등 당대 미군 전력을 상징하는 전투기 프라모델을 모두 구입했다. 조립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특히 조립에 사용하는 본드가 문제였다. 하도 손에 잘 붙어서 조립하는 중간중간 손을 씻어야 했다. 한번은 본드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다가 이상한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다. 그걸 봉투에 짜 넣어 환각용으로 쓰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다행이다.
1964년에 도입된, 록히드 마틴의 첨단 정찰기 SR-71 블랙버드. 위키피디아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내가 가장 좋아했던 프라모델은 SR-71 블랙버드였다. 1960년에 제조되어 1964년에 도입된 이 정찰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유인 항공기였다. 고도 2만4천m 성층권에서 마하 3.3으로 날았다. 나는 문방구에서 SR-71 프라모델을 보자마자 완전히 현혹됐다. 납작한 유선형 검은 기체는 당대 다른 항공기와 닮은 데가 전혀 없었다.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항공기처럼 보였다. 나는 이사를 하면서 SR-71 프라모델을 버렸던 것을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사할 때마다 과거의 흔적을 다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주인공이 부모님 댁 창고에 갔다가 어린 시절 물건들을 다시 발견하는 그런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성인이 된 나는 프라모델을 더는 만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항공기 덕후로서의 기질은 여전히 남았다. 미군이 보유한, 가히 미래의 전투기라 불리는 F-22 랩터가 한국에 올 때마다 ‘저걸 내 눈으로 봐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에 시달리곤 한다. 물론 바빠서 한번도 보러 간 적은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진짜 항공기 덕후들이라면 ‘너는 진정한 항덕이 아니다’라고 한마디 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이 나이가 되도록 항공기 덕후로 남아 있다는 것에 점수를 좀 쳐주시길 부탁드린다.
항공기 덕후로 살다 보면 외우게 되는 이름이 있다. 록히드 마틴, 노스럽 그러먼, 제너럴 다이내믹스, 맥도널 더글러스 같은 제조사 이름은 외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각각의 회사가 어떤 항공기를, 특히 군용 항공기를 제조했는지를 정확하게 외우는 것은 덕후의 도리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오랫동안 집착했던 항공기 제조사는 록히드 마틴이다. 이유는 하나다. 방산업체 역사상 최고의 천재와, 그가 만든 소규모 연구개발조직 ‘스컹크 워크스’가 있기 때문이다. 천재의 이름은 켈리 존슨이다. 그렇다. 그는 내가 여전히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항공기라고 생각하는 SR-71 블랙버드를 만든 사람이다.
여전히 실전 배치 중인 U-2
정찰기 U-2를 설계한 켈리 존슨(왼쪽)이 1966년 정찰기 조종사와 대화하는 모습. 미국 공군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켈리 존슨은 미국 미시간주 스웨덴 이민자 집안에서 1910년 2월27일 태어났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한 지 7년 뒤였다. 당시 비행기라는 것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날지 못하는 인간이 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켈리 존슨 역시 비행기에 완전히 현혹된 인간이었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 첫 비행기를 설계해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미시간대학교 항공학과에 들어간 켈리 존슨은 1933년 석사를 취득한 뒤 록히드 마틴에 취업했다. 항공기 제조를 위한 공구 디자이너로 입사했지만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아 항공 기술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항공 덕후이자 천재였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짙어지자 방위산업은 급속하게 발전했다. 켈리 존슨은 P-38 라이트닝이라는 전투기를 설계했다. 연합군 전투기 중 최고의 성능을 인정받은 기체였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여하자 켈리 존슨이 할 일도 많아졌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시절, 나치가 세계 최초의 프로펠러 없이 가동되는 제트엔진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치의 제트기가 먼저 생산되면 전황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었다. 미군은 단 6개월 만에 제트기를 만들 사람이 필요했다. 이미 항공기 천재로 명성이 자자하던 켈리 존슨이었다. 그는 미군의 명령을 받고 캘리포니아 록히드 마틴사 부지에 거대한 서커스용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의 이름은 ‘록히드 어드밴스트 디벨로프먼트 프로젝트 유닛’이었지만 주변의 고무 가공공장에서 나는 강한 냄새 때문에 사람들은 ‘스컹크 워크스’라고 불렀다. 냄새로 유명한 동물 스컹크의 이름을 딴 별명이었다. 켈리 존슨은 50여명의 스태프와 냄새나는 텐트 속에서 겨우 143일 만에 제트엔진 전투기 P-80 슈팅스타를 만들어냈다. 슬프게도(?) P-80이 실전에 배치되기 전에 2차대전은 끝나고 말았다. 대신 P-80은 F-80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생산돼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전쟁에 실전 배치됐다. 한국전쟁이었다.
그 이후로 켈리 존슨과 스컹크 워크스는 전설적인 항공기들을 창조했다. 1954년 초음속 전투기 F-104를 만들었다. 1955년에는 2만m 상공을 날 수 있는 정찰기 U-2를 개발했다. 놀랍게도 이 정찰기는 여전히 실전 배치되어 운용 중이다. 그리고 1960년 켈리 존슨은 어린 시절 프라모델로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정찰기 SR-71 블랙버드를 완성했다. 켈리 존슨은 1975년 은퇴했지만 스컹크 워크스는 여전히 남아서 항공기 역사를 바꾼 걸작 군용기들을 만들어냈다. 세계 최초 스텔스기 F-117 나이트호크,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전투기 F-22 랩터, 지나치게 고사양이라 가격이 어마어마한 F-22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F-35 라이트닝이 모두 스컹크 워크스의 창조물들이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멀티 레이블처럼 완벽한 자유
‘스컹크 워크스’의 SR-71 블랙버드 조립 라인. 위키피디아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자, 반전주의자 기자와 독자가 아마도 가장 많을 이 신문 지면에 나는 왜 수많은 전쟁에서 생명을 앗아간 전투기 엔지니어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다. 윤리적으로는 무기 따위에 애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무기라는 것이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물건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윤리와 미학은 종종 우리 내부에서 충돌하고야 만다. 그게 인간이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켈리 존슨을 끄집어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배울 만한 것은 켈리 존슨이 스컹크 워크스라는 창의적인 부서를 록히드 마틴이라는 거대 회사 속에서 운영한 방식이다. 록히드 마틴은 켈리 존슨이 풀어두면 풀어둘수록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고 켈리 존슨이 스컹크 워크스를 멋대로 꾸려가도록 허락했다. 켈리 존슨은 천재적인 인물이었지만 높은 사람들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 록히드 마틴은 멀티 레이블을 운용하듯 스컹크 워크스에 완벽한 자유를 부여했다.
켈리 존슨은 큰 회사라면 당연히 존재하는 관료주의를 모조리 없앴다. 형식주의를 혐오했던 켈리 존슨은 서류 작업도 최소화했다. 팀워크만 잘 운용된다면 개인의 자유도 완벽하게 보장했다. 경쟁사인 맥도널 더글러스 등 다른 방산업체들도 비슷한 소규모 조직을 만들었다. 모조리 실패했다. 록히드 마틴 경영진과 달리 다른 회사 경영진들은 소규모 조직에 완벽한 자유를 주기를 꺼렸다. 내부 조직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고질적 관료 문화를 벗을 수 없었던 탓이다. 관료 문화라는 게 그렇다. 창의적인 천재들이 뭘 알아서 해내는 꼴을 보질 못한다. 혹은 그걸 자신들의 업적으로 돌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린다. 독자 여러분이 지금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켈리 존슨은 1985년에 자서전(‘Kelly: More Than My Share of it all’)을 내놓았다. 한국에 아직도 출간되지 않은 이 책은 누군가 어서 번역 소개해야 마땅하다. 날렵한 소규모 조직의 창의성이 점점 더 필요해지는 이 시대에 더 어울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켈리 존슨은 1990년 12월21일 80살로 사망했다. 스컹크 워크스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항공기의 미래를 열어젖힐 새로운 발명품들은 여전히 그 냄새나는 이름 아래 개발 중이다.
김도훈│문화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