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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기자의 시각] 김호중과 스스로 빠진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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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가수 김호중. 2024.3.26/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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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가수 김호중(33)씨의 ‘음주 뺑소니’ 논란을 취재하면서 막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9일 김씨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도로에서 택시와 부딪치고 달아난 다음 날, 매니저가 김씨 옷을 입고 “내가 운전했다”고 경찰에 거짓 자수를 했다. 김씨는 경찰의 전화·문자에도 답하지 않은 채 17시간 동안 시간을 끌었고 사실상 술이 다 깬 다음에 음주 측정을 받았다. 소속사 대표는 “매니저의 거짓 자백은 내가 지시한 것”이라고 했다.

“유흥업소를 방문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는 김씨 변명은 “술잔은 입에 대긴 했지만 마시진 않았다”로 바뀌었다. 술은 안 마셨다면서 대리 기사가 모는 차량을 타고 귀가했고, 다시 집에서 나와 직접 운전 중 사고를 냈다. 핵심 증거인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카드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김씨 측은 “메모리카드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더니 이후엔 “매니저가 알아서 없앴다” “대표가 시켰다”고 했다.

김씨는 10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 “어릴 때 학교 끝나고 데리러 와주는 부모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는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인가?’라며 사람들을 미워했다고 한다. 역경을 딛고 유명 가수로 성장한 그는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이리저리 살았을 거란 착각도 마라’(태클을 걸지 마)라고 노래했다. 적잖은 사람이 그 삶의 굴곡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 김씨가 보여준 ‘운전자 바꿔치기’ ‘시간 끌다가 음주 측정 받기’ 같은 행태는 이른바 ‘망나니 재벌 3세’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 내가 지시했다”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소속사 대표의 모습에선 과거 거물 정치인이나 기업 총수의 비리를 떠안고 감옥에 가던 행동대장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소속사 하는 짓이 무슨 조폭 같다”고 분노한 국민들 마음속엔 ‘어떻게 너마저’ 하는 배신감과 허탈감이 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 측이 전문 변호사의 조언을 받고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음주 운전 혐의는 사고 현장에서 측정한 수치가 법정에 제출되지 않으면 유죄가 나오기 쉽지 않다. 이런 증거재판주의를 교묘하게 악용해 현장에서 작심하고 도주했다는 말도 나왔다. 김씨는 검찰총장 권한대행 출신 호화 전관을 선임했다.

일반 국민의 상식, 도덕 기준이야 어쨌든 법정에서 무죄만 나오면 된다는 식의 ‘사법 리스크 대응 논리’를 정치인이나 재벌이 아닌, 역경을 딛고 성공한 가수마저 서슴없이 구사하는 현실에 많은 팬과 국민이 슬퍼한다. 일부 극성 팬의 지지에 안심한 듯 공연 일정을 강행하는 모습엔 현 정치권이 겹치기도 한다. 김씨의 열혈 팬이었다는 한 50대 여성 식당 종업원은 이렇게 말했다. “잘못했다는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울까. 죗값 다 받고 나오면 그래도 아들처럼 다시 안아줬을 텐데.”

[고유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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