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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르포] 하늘의 도깨비 ‘팬텀’ 고별 국토순례…‘후배 전투기’ KF-21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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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도입 후 55년만에 퇴역
신고식 후 49년 만에 순례비행


매일경제

9일 F-4E 팬텀 ‘필승편대’가 고별 국토순례 비행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공군]


지난 9일 경기 수원시 제10전투비행단에서 대한민국 영공을 55년간 지켜온 팬텀은 다음 달 7일 퇴역식을 한 달 앞두고 49년 만의 고별 국토순례비행에 나섰다. 하늘은 구름도, 바람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는 마치 팬텀의 마지막 비행에 안녕을 고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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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경기 수원 상공을 날고 있는 F-4E 팬텀 ‘필승편대’. [대한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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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전투비행대대 소속 F-4E 4대로 구성된 ‘필승편대’는 경기도(수원, 평택), 충청도(성환, 천안, 청주, 충주), 경상도(울진, 포항, 울산, 부산, 거제, 대구, 사천), 전라도(여수, 고흥, 가거도, 군산) 등 전국 각지를 누비며 고별 비행을 진행했다.

국민들의 방위성금으로 구매한 소중한 팬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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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2월 방위성금으로 구매한 F-4D가 수원기지를 힘차게 이륙하는 모습. [대한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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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는 1969년 F-4D를 미국에서 공여받으며 국내에 처음 도입됐다. 미국은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한국에 F-4D 6대를 무상 임대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 영국, 이란에 이어 4번째로 전투기를 보유한 나라가 됐다. 이후 1975년 F-4D 5대를 추가로 구입하며 북한의 공군력을 압도하는 위력을 가지게 됐다.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의 중국 방문, 베트남 공산화 등 안보 위기가 현실화하면서 방위성금 모금이 진행됐다. 당시 최신 기종이었던 F-4D 5대는 방위성금 163억원 중 71억원을 들여 구매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F-4D 5대에 ‘필승편대’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를 기념해 서울 등 12개 주요 도시 상공을 순례비행하는 신고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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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방위성금으로 구입한 F-5D의 순례 비행 신고식을 알리는 보도자료. [대한민국 공군]


현재 공군은 성능 개량형인 F-4E 10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그 중 6대가 수원 기지에 있다. 선배 기종의 편대명을 그대로 물려받은 현직 ‘필승편대’가 국토 순례 비행에 나선 것은 신고식 이후 49년 만이다.

“팬텀은 북한이 비행기 못 띄울 정도의 위용 가져”
이번 비행에서 편대를 이끄는 1번기만 전·후방 조종사 모두 베테랑으로 편성됐고, 2~4번기 후방석에는 기자들이 탑승했다. 전천후 전폭기인 팬텀은 F-15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보기 드문 2인승 전투기였다. 당시 게임체인저로 불렸던 레이더 미사일을 운용하기 위해, 무기통제사로 불리는 후방석 조종사는 △레이더 운용 △좌표 입력 △공대지 레이저 유도 폭탄(LGB) 타켓팅 등 무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팬텀 후방석 조종사로 830시간을 비행한 이성진 대구 제11전투비행단 부단장(대령)은 “공대지 미사일 팝아이를 비롯해 최대 8480kg이라는 어머어마한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팬텀이 떴다하면 북한이 도깨비 위용에 짓눌려 아예 비행기 자체를 띄우지 않았다”며 “후방석은 좁은 조종석(Cockpit·콕핏), 제한된 시야, 비행 중 지속적으로 레이더 및 계기판 관측 등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멀미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총 8명의 조종사와 기자들이 일오횡대로 예열중인 4기의 팬텀이 있는 격납고를 향했다. 4번기는 49년 전 방위성금헌납기의 모습을 재연해 정글무늬 도장을 새로 했고, 나머지 3기는 회색 바탕에 ‘국민의 손길에서, 국민의 마음으로/ 1969~2024’라는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문구 양 옆에는 팬텀의 고유 캐릭터인 스푸크(도깨비) 문양이 새겨졌는데 왼쪽엔 빨간마후라와 태극무늬를 더한 스푸크가, 오른쪽에는 조선시대 무관의 두정갑을 입은 스푸크가 위치했다.

‘스푸크’는 팬텀 최초 개발 당시, 기술도면 제작자가 항공기의 후방 모습을 보고 착안해 그린 캐릭터로, 팬텀을 운용한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았다. 팬텀을 후방에서 바라봤을 때 마치 서양의 전통적인 유령(Phantom)과 흡사해 보여 생겨난 캐릭터다. 밑으로 처진 수평꼬리날개는 유령이 눌러쓴 모자로, 두 개의 엔진 배기구는 유령의 두 눈처럼 보인다.

활주로를 마주한 팬텀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헬멧과 귀마개를 뚫고 거친 엔진음이 파고들었다. 기체가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르는데 걸린 시간은 단 8초. 10시 정각, ‘필승 편대’ 고별 국토순례비행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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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동해안 상공을 날고 있는 F-4E 팬텀 ‘필승편대’. [대한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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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 후 편대는 핑거팁 대형(손가락을 붙였을 때 검지부터 소지까지의 삼각형 모양)을 유지하면서 4번기만 좌우로 기동하며 상황에 따라 레프트 핑거팁, 라이트 핑거팁 대형을 만들었다. 기체간 간격을 불과 2, 3m. 옆 기체 조종사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팬텀이 가장 활약했던 지역인 동해안에 다다르자 편대는 핑거팁 대형을 느슨하게 풀었다.

팬텀은 냉전시대에 동해안에서 구소련 전력을 차단하며 맹활약했다. TU-16(1983), TU-95(1984) 폭격기와 핵잠수함(1984)을 상공에서 식별해 차단했다. 1998년 2월에는 러시아 IL-20 정찰기에 대한 전술조치를 펼치기도 했다.

포항·울산·부산·거제 등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전초기지였던 한반도 남동부 주요 도시들을 거친 필승편대는 대구로 기수를 돌리기 위해 남에서 북으로 급선회했고 수원 기지 이륙 후 1시간 46분이 지나서야 ‘팬텀의 고향’으로 불리는 대구 제11전투비행단에 착륙했다. 대구기지는 1969년 팬텀(F-4D)이 미국·영국·이란에 이어 네번째로 도입됐을 당시 최초의 팬텀 비행대대가 창설된 곳이다. 2005년 F-15K가 도입돼 팬텀의 공대지 타격 역할을 물려받기 전까지 팬텀의 주 기지 역할을 했다. 필승편대는 전투기에 기름을 채우고 대구기지를 출발했다.

‘후배 전투기’ KF-21과 함께 20분간 고별 비행
대구기지를 떠나고 10분 가량 흐르자 우리 공군력의 막내이자 기대주인 KF-21 2기가 합류했다. 수신기 너머로 KF-21을 뜻하는 ‘보라매’라는 콜 사인이 들려왔다. 팬텀과 KF-21은 델타(Δ) 대형을 이뤘다. 국토순례비행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F-15K 2기는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이 순간을 촬영했다. 공군의 과거(팬텀), 현재(F-15K), 미래(KF-21)가 한 자리에 모인 역사적 장면이었다.

1969년 도입 당시의 팬텀기는 지금의 F-35와 비견될 수 있는 미국 첨단 항공 기술의 집약체였다. 2005년 도입된 F-15K는 ‘타우러스’ 미사일로 대전에서 평양을 정밀 타격할 수 있는 ‘킬체인’의 핵심 기체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공동개발 계약 이행 문제로 논란이 됐지만 KF-21은 우리 기술로 개발한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로, 향후 팬텀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될 핵심 기체다. 세 기종이 경남 합천에서 사천을 거쳐 전남 고흥까지 약 20분을 함께 날았다. 눈 아래로는 삼천포대교, 여수 충무대교, 한려수도가 펼쳐졌다. ‘국토를 지킨다’는 말이 구호가 아니라 팩트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고흥 상공에서 KF-21은 우측으로 급선회하며 이탈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조심히 복귀하십시요.” 대선배 팬텀 편대에 막내가 보내는 헌사로 들렸다. 팬텀은 축포를 쏘듯 플레어를 발사하며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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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남해안 상공을 날고 있는 F-4E 팬텀 ‘필승편대’와 KF-21. [대한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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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편대는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소흑산도)를 향했다. 팬텀은 1971년 소흑산도에 출현한 간첩선을 격침하는 작전에서 활약했다. 가거도에서 서해를 따라 북상한 팬텀편대는 이날 새만금방조제를 지나 군산앞바다에서 수원기지를 향해 동쪽으로 마지막 급선회에 나섰다. 팬텀 편대는 급선회와 함께 축포처럼 플레어를 터뜨렸다. 수평계는 ‘수평’이라 알렸지만 급선회를 시작하자 급상승기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기자의 목이 앞으로 꺾였다. 중력의 2~3배 정도 되는 힘이 가해졌다.

대구기지에서 이륙한지 약 1시간30분만에 공군 수원기지에 착륙했다. 감속을 위해 후방에 전개된 드래그슈트가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이날 방위성금헌납기 당시 모습으로 도색한 팬텀을 몰았던 박종헌 소령은 “1975년 국민들의 성금으로 날아오른 ‘필승편대’의 조국수호 의지는 불멸의 도깨비 팬텀이 퇴역한 후에도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 공동취재단·김성훈·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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